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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상원
미국 상의원 또는 미국 상원(United States Senate)은 양원제인 미국 의회의 상원이다.\n\n미국 부통령이 상원의장이 된다. 각 주당 2명의 상원의원이 선출되어 100명의 상원의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임기는 6년이며, 2년마다 50개주 중 1/3씩 상원의원을 새로 선출하여 연방에 보낸다.\n\n미국 상원은 미국 하원과는 다르게 미국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미국 연방 행정부에 각종 동의를 하는 기관이다. 하원이 세금과 경제에 대한 권한, 대통령을 포함한 대다수의 공무원을 파면할 권한을 갖고 있는 국민을 대표하는 기관인 반면 상원은 미국의 주를 대표한다. 즉 캘리포니아주, 일리노이주 같이 주 정부와 주 의회를 대표하는 기관이다. 그로 인하여 군대의 파병, 관료의 임명에 대한 동의, 외국 조약에 대한 승인 등 신속을 요하는 권한은 모두 상원에게만 있다. 그리고 하원에 대한 견제 역할(하원의 법안을 거부할 권한 등)을 담당한다. 2년의 임기로 인하여 급진적일 수밖에 없는 하원은 지나치게 급진적인 법안을 만들기 쉽다. 대표적인 예로 건강보험 개혁 당시 하원이 미국 연방 행정부에게 퍼블릭 옵션(공공건강보험기관)의 조항이 있는 반면 상원의 경우 하원안이 지나치게 세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퍼블릭 옵션 조항을 제외하고 비영리건강보험기관이나 보험회사가 담당하도록 한 것이다. 이 경우처럼 상원은 하원이나 내각책임제가 빠지기 쉬운 국가들의 국회처럼 걸핏하면 발생하는 의회의 비정상적인 사태를 방지하는 기관이다. 상원은 급박한 처리사항의 경우가 아니면 법안을 먼저 내는 경우가 드물고 하원이 만든 법안을 수정하여 다시 하원에 되돌려보낸다. 이러한 방식으로 단원제가 빠지기 쉬운 함정을 미리 방지하는 것이다.날짜=2017-02-05
대통령을 포함한 미국의 행정부 견제권을 갖는 국가 기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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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각(內閣, cabinet)은 행정부의 주요 각료들로 구성되는 국가의 주요기관이다.\n\n의원내각제에서 내각은 수상과 여러 장관으로 조직되는 합의체로, 국가의 행정권을 담당하고 국회에 대한 연대책임을 갖는다. 의원내각제에 있어서 내각은 국가행정의 최고기관인 한편 국민이 구성시키는 의회에 의하여 철저히 견제되어 의회민주주의 체제를 이룬다.\n\n그 직접적 유래는 영국에서 국왕의 정치를 자문하던 추밀원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내각은 추밀원의 일개 회의에서 시작하였다가 권한이 집중되어 분리된 기관으로, 이후 국왕의 실권이 사라지고 일명 웨스트민스터 시스템으로 불리는 의원내각제가 성립하면서 의회에 의한 민주적 행정부를 이루게 되었다.\n\n한편 국가원수에게 대부분의 권력이 집중되는 대통령중심제와 군주제에서 내각은 원칙적으로 의결권이 없거나 의결의 구속력이 없는 보좌기관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예: 대한민국의 국무회의)\n\n대한민국은 국무회의가 내각에 속하며 권한이 대통령에 비해 제한적이다. 과거 왕조시대 때는 고려시대의 중서문하성, 중추원, 육부 또는 조선시대의 의정부와 육조가 내각과 비슷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미국의 외교정책의 수립과 이행에 대한 주된 책임을 대통령이 지게 되어 있으나, 의회도 이에 대해 강한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다. 우선 의회는 전쟁을 선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하원은 대통령의 외교정책 수행에 필요한 예산에 대해 강한 통제력을 가지고 있으며, 상원도 재원에 대한 통제가 가능하다. 특히 상원의 경우에는 고급 외무 관리의 임명에 대한 통제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 체결하는 모든 조약에 대한 비준권을 가지고 있다. 의회의 이와 같은 제재 권한은 행정부와 의회의 갈등을 초래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에드워드 코르윈(Edward Samuel Corwin) 교수는 미국의 정치체계가 외교정책에 있어서 행정부와 의회 간의 투쟁을 초래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 좋은 예로서는 상원이 국제연맹 헌장의 비준을 거부한 사실을 들 수 있다. 의회와 행정부간에는 긴밀한 협조가 이루어지고 있다. 유엔헌장 비준 당시의 의회와 행정부 간의 긴밀한 협조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협동외교는 한국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는 '초당외교'라는 말과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 베트남 전쟁으로 말미암아 파생된 행정부와 의회 간의 갈등은 심각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의회가 대통령에 가하는 압력은 행정부의 독주를 견제하는 동시에 건전한 방향의 미국 대외정책을 모색하고 있다. 의회는 국민의 대표기구로서 국민의 의사와 직결돼 있다. 따라서 대외정책의 수립이나 이행 과정에도 항상 의회를 '문제아'로 취급하거나, 또는 그러한 범주 내에 의회의 기능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국회에 관해 규정하는 헌법 제4장의 첫 조문이다.\n\n본조에서 말하는 \"국권\"이란 국가가 갖는 지배권을 포괄적으로 나타내는 국가 권력, 곧 국가의 통치권을 의미한다. 국권은 일반적으로 입법권·행정권·사법권의 3권으로 분류되지만, 그 중에서도 주권자인 국민의 의사를 직접 반영하는 기관으로서 국회를 \"최고 기관\"으로 규정한 것이다. 다만, 최고 기관이라 해서 타 기관의 감시와 통제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니며 권력 분립 원칙에 따라 국회에 대한 행정권, 사법권의 견제를 받는다.\n\n또한 일본 전체 국민을 대표하는 기관을 국회로 규정함으로써, 국회는 일본의 유일한 입법 기관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일본 제국 헌법 하에서 입법권은 천황의 권한에 속했으며, 제국의회는 천황의 입법 행위를 보좌하는 기관에 불과했다.\n\n여기서 \"유일한 입법 기관\"의 의미로는 다음과 같은 해석이 있다.\n* 국회 중심 입법 원칙 : 국회가 국가의 입법권을 독점한다는 원칙\n* 국회 단독 입법 원칙 : 국회의 입법은 다른 기관의 간섭 없이 이루어진다는 원칙\n\n또한 국회의 입법에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행정 기관은 정령 등의 규칙 제정권을 가지며(헌법 제73조 제6호), 최고재판소는 소송에 관한 절차, 변호사 및 재판소에 관한 내부 규율 및 사법 사무 처리에 관한 사항에 대한 규칙 제정권(헌법 제77조 제1항)을 가진다.", "이하의 국가들은 의회에서 행정부 수반을 선출한다는 점에서 내각제와 닮았다. 그리고 이들 국가들 중 상당수는 행정부 수반이 의회해산권을 갖고, 의회는 내각불신임권을 갖는데 이점 역시 내각제와 닮았다. 하지만 내각제와 달리 의회에서 선출되는 자는 행정부 수반의 지위 뿐만 아니라 국가 원수의 지위도 가진다. 그래서 의회에서 선출되는 자의 직위는 총리가 아니라, 대통령이다. 이처럼 1인이 행정부 수반과 국가 원수의 지위를 겸한다는 점에서 대통령중심제와 닮았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이들 국가들의 정부 형태는 대통령제와 내각제의 절충형이지만, 행정 권한이 2인에게로 분리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원집정부제는 아니다.\n\n \n* 나우루\n* 남아프리카 공화국\n* 마셜 제도\n* 마카오\n* 미얀마\n* 미크로네시아 연방\n* 보츠와나\n* 산마리노\n* 수리남\n* 키리바시\n* 홍콩", "전 세계 원조 NSC로서, 전 세계 언론에 자주 보도되는 것은 1947년 창설된 미국 NSC이다. 주로 백악관의 지하에 마련된 백악관 상황실에서 소집된다. 한국은 대한민국 헌법 91조에 의해 설립되어 있으며, 역시 미국과 같은 청와대 지하벙커가 있다.\n\n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의 경우, 대통령, 부통령, 국무장관, 국방장관, 백악관 비서실장, 백악관 안보수석, 백악관 안보부수석이 위원이며, 합참의장이나 정보부 책임자는 고문(advisor)일 뿐이다. 상급위원은 외무장관과 국방장관이다. 즉, 대통령, 외무장관, 국방장관 3명이 NSC의 핵심 3인방이다. 대한민국의 경우, NSC 자체가 대통령에 대한 자문(advice)기관이다.\n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는 대통령 지시에 대한 조언과 동의권을 갖고 있다.\n\n대한민국의 NSC가 미국처럼 대통령궁 지하벙커에서 열리며, 전쟁에서 실질적인 전시 작전권을 행사하는 \"긴급비상회의\"의 성격인데 비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NSC라는 국방위원회는, 주석궁 지하벙커에서 개최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개최되는 평시의 공식 회의 기관이라서, \"실질적인 의미\"가 좀 다르다.\n\n2013년 1월 말리 분쟁과 관련, 알제리에서 알카에다가 일본인 인질 12명을 살해했다. 이와 관련, 극우파 성향인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일본에 미국의 NSC와 유사한 NSC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현재의 일본 안전보장회의는 \"총리관저 지하벙커에서 열리는 전시 작전권을 행사하는 긴급비상회의\"는 아니며, 지상에서 평시에 열리는 회의체로 보인다.", "미국 합동참모회의(美國 合同參謀會議, JCS: Joint Chiefs of Staff)는 미국의 문민정부에 조언 및 권고하는 미군 최고위급의 참모 회의이다.\n\n이를 보좌하는 참모기관으로 미국 합동참모본부(美國 合同參謀本部, Joint Staff)가 있으나, 이에 준하는 한국 합동참모본부의 영문명칭은 Joint Chiefs of Staff이다.\n\n미국 대통령은 합동참모의장과 합동참모차장을 임명한다. 이들은 군령권과 군정권을 갖진 않으나 대통령과 국방장관의 국방분야 수석자문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현재 미국의 합참의장은 마크 알렉산더 밀리이다.\n\n유사한 기관으로 종종 Chiefs of Staff Committee (COSC)가 있다. 이것은 다른 국가들에 일반적으로 존재한다.", "1957년 말부터 1958년 초에 걸쳐 미국 국가항공자문위원회 (NACA)는 그때까지 자신들이 한 일과 같은 역할을 맡은 비군사적 기관의 신설에 대한 검토를 시작했다. 또 그 개념을 정밀 조사하기 위해서 몇 개의 위원회를 창설했다. 1958년 1월 12일, NACA는 가이포드 스테버(Guyford Stever)를 의장으로 하는 '우주 기술 특별 위원회' 를 설립했다. 이 위원회는,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미국 시민권을 획득한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를 리더로 하는 미국 육군 탄도 미사일국의 우주 로켓 개발 그룹에서 제안된, 거대 로켓 개발 계획을 자문하는 임무도 띠고 있었다.\n\n1958년 1월 14일, NACA 책임자 휴 드라이덴은 '우주 기술을 위한 국가적 조사 계획'을 발표해, 이하와 같이 말했다.\n\n미국의 위신 및 군사적 필요성의 양면에서 생각하면, 이번 도전(스푸트니크)에 휩쓸린 우주 정복을 위한 조사 및 개발의 계획을 정력적으로 추진하는 것은 긴급하고 중요한 과제이다.(중략) 그 때문에, 비군사적인 국가 기관에 의해서 과학적인 조사를 해야 한다는 제안이 이루어졌다.(중략) NACA는 우주 개발 기술의 주도권을 취해 그 성과를 급속히 확대해 연장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n\n1958년 1월 31일 오후 10시 48분 (미국 동부표준시), 미국 첫 인공위성인 익스플로러 1호가 발사되었다. 1958년 3월 5일, 대통령 직속 과학 기술 자문 위원회의 위원장 제임스 킬리안(James Killian)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민간 우주 계획을 위한 조직」이라는 제목의 서신을 보내, 일정의 지연을 최소한으로 억제해 조사 계획을 확장할 수 있도록 NACA를 강화해 재편한 조직에 의한 문민 통제형의 우주 계획을 창립하는 것을 재촉했다. 동년 3월 말에 NACA는, 당시 기획 중이었던 수소와 불소를 추진제로 하는 100만 파운드(453톤, 445만 뉴턴)의 추진력을 가지는 3단 로켓의 개발 계획을 포함한, 「우주 개발에 관한 제의」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n\n동년 4월,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의회 연설을 통해, 민간 주도의 우주 개발 기관을 신설할 의향과 미국 항공우주국 설립을 위한 예산안을 설명했다. NACA의 조사 활동 하나를 봐도, 그 규모나 진전, 관리, 운영 등에 있어서 변화가 이루어져야 했다. 7월 16일, 의회는 예산안을 승인하고, 동시에 NASA 설립을 위한 구체적인 근거가 된 '국가 항공 우주 결의'에 대해서도 약간의 언급을 했다. 그 이틀 후, 베르너 폰 브라운이 인솔하는 작업 그룹은 예비 보고서를 제출해, 현재 미국의 우주 개발은 여러 가지 기관이 따로 시행하고 있어 상호 제휴가 결핍되어 국가적 노력이 중복되어 손해가 크다는 것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스테버의 우주 개발 위원회는 브라운의 비판에 동의해, 10월에는 최종적인 초안이 제출되었다.", "러시아의 정치는 러시아 연방 이원집정부제 공화제를 기본으로 한다. 러시아의 헌법에 의하면, 러시아의 대통령이 러시아의 최고 국가원수이며, 총리가 이끄는 두마(의회)에는 다당제가 보장된다. 총리는 의회의 허락을 받아 대통령의 추천으로 임명되며, 입법권은 러시아 상원과 하원에 나뉘어 있다. 하지만 대통령의 권한이 워낙 강력하기에, 이와 같은 입법권이 점차 약화되고 있는 추세이다.\\n\\n소비에트 연방이 1991년에 붕괴된 이후, 러시아는 70년 동안의 공산주의식 정치 체제에서 탈피하기 위하여 크게 애써야만 했다. 예를 들어 입법부와 행정부의 수반들이 국가 정책 방향과 권력 분배 방식에 대하여 심각한 의견 차이를 드러냈고, 1993년 9월과 10월에 이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러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의회를 해산하기 위하여 군대를 동원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러시아의 첫 헌정 통치 기간이 끝났고, 이후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어 대통령에게 유례없을 정도로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게 되었다. 이 헌법은 1993년에 새롭게 구성된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n\\n이후 새로운 헌법과 다양한 이념을 가진 정당을 확보한 러시아의 정치는 점차 안정기를 맞게 된다. 1990년대 중반, 러시아의 지방 자치 단체들이 점차 경제력과 행정력을 확보하게 되며, 러시아의 중앙집권식 정치 구조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행정부와 입법부 사이의 갈등이 새 헌법의 제정으로 일부 약화되기는 하였으나, 두 세력은 여전히 극명한 대립을 보이며 러시아의 정치를 혼란스럽게 하였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행정부는 개혁파들로 이루어졌고, 의회의 하원에 해당하는 러시아 두마는 공산주의자들과 국가주의자들이 장악한 상태였다.", "국가판무관부(라이히코미사리아트. 복수형 라이히코미사리아테)는 독일어로 행정부의 국가판무관(라이히코미사리아)이 수장인 행정기관을 이르는 말이다. 공공인프라, 토지계획, 인종청소 등의 행정 업무로의 국가판무관부라는 용어는 독일 제국 및 나치 독일 시기 전반에 걸쳐 존재했지만, 통상적으로는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나치 독일이 점령한 국가를 준식민지로 삼기 위해 계획한 일종의 총독부를 뜻한다. 이 국가판무관부은 법적으로는 독일국의 외부의 지역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아돌프 히틀러가 직접 임명한 주지사급에 해당한 최고행정부 국가판무관이 통치하는 사실상의 제국 내 영토였다. 또한 국가판무관부 산하에 총괄판무관부를 두어 행정을 관리하였다.\n\n이 행정기관은 여러가지 이유로 도입하게 되었다. 서유럽과 북유럽에 설립되거나 계획된 국가판무관부는 나치 독일이 전쟁 전 외부 영토였던 독일어권을 편입하면서 영토로 통합하기 전 과도기적 기구로 운용했다. 동유럽 지역은 독일인 정착지, 천연자원 착취 등의 레반스라움을 위한 식민주의, 제국주의적 성격으로 설립되었다. \n\n행정 기관의 점령지 정책도 이 2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독일이 점령한 대부분의 지역처럼 지역 행정부와 관료들은 독일의 감독 아래 중-하급의 일상적인 업무를 계속 수행했다. 전쟁 기간 서유럽과 북유럽은 기존에 존재했던 행정부 구조를 유지한 채로 국가판무관부를 수립했으나, 동유럽은 완전히 새로운 행정 구조를 만들었다. \n\n국가판무관부의 모든 지역은 나중에는 대게르만 제국(Grossgermanisches Reich)로 통합될 예정이었으며, 이 제국의 영역은 북해부터 우랄산맥까지의 영역을 포함한 광대한 지역이었다", "의회(議會, parliament)는 현대 민주주의 정치체제에서 입법부, 다시 말해 법을 심의하고 제정하는 중앙정부 기관이나 조례를 만드는 지방정부 기관을 일컫는다.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의회에서는 선거권을 가진 시민에 의해 선출된 대표들로 주로 구성되며, 이들 대표들을 의원(議員)이라 부르고 있다. 이 정치제도는 영국에 그 뿌리가 있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인도유럽어에서 흔히 의회를 일컫는 낱말 Parliament(영어), Parlament(독일어), Parlamento(이탈리아어) 따위는 프랑스어 parler, '말하다'에서 파생된 Parlement에서 온 것으로 풀이된다. 세계 최초의 의회는 930년에 아이슬란드에서 생겨난 알팅그이지만,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n\n의회는 현대 민주주의의 정치 체제에서 법을 제정하는 기능이외에 중요한 역할로서 행정부의 권한을 견제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를테면 의원은 정해진 절차를 거쳐 정부 예산의 심의와 결의, 그리고 정부의 장관으로부터 의문 여지가 있는 사항이나 문제에 관한 보고를 요구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의회는 여러 심의 위원회와 청문회를 두고 있다. 또한 현대 민주주의 거의 대부분의 의회는 특정 이해나 정치적 이념을 고수하는 몇몇 정당들에 의해 지배되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의회는 흔히 정당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n\n성문 헌법으로 시민주권의 원리를 선포하고 시민의 기본권리를 엄격히 보장하도록 하고 있는 근대 정부기관에서는 이른바 삼권분립주의(三權分立主義)에 입각하여 입법권은 의회에, 사법권은 법원에, 그리고 행정권은 정부(대통령 또는 내각)에 각각 부여함으로써 이 세 정부기관으로 하여금 각자의 권한을 서로 독립·행사하게 하고 있다. 이 경우에 주권자인 시민은 원칙적으로 정치에 직접 참여하지 아니하고 그가 선출한 대표자로서 의회를 구성, 입법 등의 중요한 국사를 처리하게 하고 있으니, 그와 같은 정치체제를 대의민주정치(代議民主政治)라 일컫는다. 의회가 바로 그러한 대의민주정치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관리예산실의 전신은 1921년 예산회계법에 의하여 설치된 미국 재무부의 예산국(the Bureau of Budget)이다. 이 기관이 1939년 정부조직법의 개정에 따라 미국 재무부로부터 미국 대통령실로 이관되어 예산국은 미국 대통령의 참모 기관이 되었다. \n\n리처드 닉슨 행정부 때인 1970년 제2차 조직개편에 따라 1970년 7월 1일 예산국은 관리예산실(OMB)로 승격되었다. \n\n1990년대에 관리예산실은 내부의 자원관리실(Resource Management Offices)에서 각 사업의 담당자들이 관리와 예산 두가지 역할을 결합하여 수행하도록 함으로써 관리 부문 직원과 예산 부문 직원 사이의 차이를 없는 개편을 하였다.\n\n현재 관리예산실은 대통령 직속의 참모 기관으로서 예산 기능은 물론 법제(法制)와 행정관리(administrative management)에 관한 기능까지 수행하는 더 강력한 기관이 되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1972년 10월 17일 10월 유신으로 제4공화국이 출범하면서 헌법에 따라 구성된 간접민주주의 기관이다. 가장 중요한 기능은 유신헌법의 핵심인 대통령의 간접 선거 기능을 담당한 것이다. 1973년 8월부터 약칭은 국민회의로 정해졌다. 국민회의는 전국의 각 지역구에서 국민의 직접 선거로 선출된 대의원들로 구성되었는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은 비공식적으로 통대라는 약칭으로 불리었다.\n\n유신헌법 제3장에 의하면 통일주체국민회의는 국가의 정상기관(頂上機關)이자 주권적 수임 기관으로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촉진하기 위한 국민의 총의가 모인 곳이다. 따라서 6년의 임기를 가진 이 기관의 대의원은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되며, 대통령을 선출하고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유신정우회)을 선출하며, 국회의 헌법 개정안을 최종 의결하고 통일 정책을 심의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n\n신민당은 제9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당이 대통령 후보를 지명하고, 대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대의원 후보들은 지지하는 대통령 후보를 정하고 선거를 치르게 하는 미국의 대통령 선거인 선거 방식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 개정안을 내기도 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n\n사실상 박정희 대통령의 거수기 노릇을 하던 이 기관은 1979년 10월 26일 그가 암살되자 그 후임 대통령인 최규하와 전두환을 형식적으로 선출해주는 역할을 맡은 뒤, 이듬해 제5공화국 헌법 발효와 함께 해체되었다. 그 후 대통령간선제를 담당하는 기관은 대통령 선거인단으로 교체되었으며, 사무처와 인적구성 및 대통령 직속 통일 관련 기구로써의 역할은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를 거쳐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로 이어지고 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1972년 10월 17일 10월 유신으로 제4공화국이 출범하면서 헌법에 따라 구성된 간접민주주의 기관이다. 가장 중요한 기능은 유신헌법의 핵심인 대통령의 간접 선거 기능을 담당한 것이다. 1973년 8월부터 약칭은 국민회의로 정해졌다. 국민회의는 전국의 각 지역구에서 국민의 직접 선거로 선출된 대의원들로 구성되었는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은 비공식적으로 통대라는 약칭으로 불리었다.\\n\\n유신헌법 제3장에 의하면 통일주체국민회의는 국가의 정상기관(頂上機關)이자 주권적 수임 기관으로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촉진하기 위한 국민의 총의가 모인 곳이다. 따라서 6년의 임기를 가진 이 기관의 대의원은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되며, 대통령을 선출하고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유신정우회)을 선출하며, 국회의 헌법 개정안을 최종 의결하고 통일 정책을 심의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n\\n신민당은 제9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당이 대통령 후보를 지명하고, 대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대의원 후보들은 지지하는 대통령 후보를 정하고 선거를 치르게 하는 미국의 대통령 선거인 선거 방식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 개정안을 내기도 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n\\n사실상 박정희 대통령의 거수기 노릇을 하던 이 기관은 1979년 10월 26일 그가 암살되자 그 후임 대통령인 최규하와 전두환을 형식적으로 선출해주는 역할을 맡은 뒤, 이듬해 제5공화국 헌법 발효와 함께 해체되었다. 그 후 대통령간선제를 담당하는 기관은 대통령 선거인단으로 교체되었으며, 사무처와 인적구성 및 대통령 직속 통일 관련 기구로써의 역할은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를 거쳐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로 이어지고 있다.",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의 국내 및 대외 정책의 기본 방향을 결정하며, 국내외에서 러시아를 대표하는 존재이다. 대통령은 입법부와의 협의를 통해 러시아 대사를 임명하고 해임하며, 외국 대사들의 신임장을 발급하며, 국제 회담을 수행하며 국제 조약에 서명할 권리가 있다. 특히 옐친 대통령은 특별 규정에 따라 1996년 6월에 종료되도록 규정된 임기를 마치고 새 헌법의 대통령 권한을 행사하여 재집권할 수 있었지만, 그를 포기하고 합법적인 절차를 따라 선출되었다. \n\n1996년 대통령 선거 운동에서 일부 후보자들은 대통령직을 철폐할 것을 주장하며, 그 막강한 권한이 독재자와 다를 바가 없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당시 옐친 대통령은 러시아가 \"수직적 권력 구조와 강한 지도력\"을 원하고 내각 정부제는 행동하기보다는 무의미한 대화나 매일 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강력한 대통령 권한에 대하여 옹호하였다. 새로운 헌법에 규정된 몇몇 권한으로 대통령이 입법부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게 되었다. 대통령은 사법적 검토 없이 법의 힘을 가진 법령과 지시를 내릴수있는 광범위한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헌법에 따르면 그 문서나 다른 법률을 위반해서는 안된다. 특정 조건에서, 두마의 하원 의회는 소비에트의 상원 의회를 대통령은 국민 투표 일정(이전에 국회에 배정 된 권력)을 정하고 주법에 초안을 제출하고 연방법을 공포 하라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n\n러시아의 국가 구성은 20개 자치공화국과 7개 자치주 및 10개 자치관구로 구성된다. 행정은 6개 지방(크라이)과 49개 주(오블라스티)로 나뉜다. 헌법상 러시아의 대통령은 국정전반에 걸쳐 강력하고 포괄적인 권한을 부여받고 있다. 1993년 12월 12일 국민투표를 통해 공식 채택된 신(新)헌법은 프랑스의 드골 헌법을 모방하여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고 구 소련 시절 무소불위의 막강한 권력을 지녔던 의회의 활동영역을 크게 제한하고 있다. 즉 새헌법은 하원인 두마에 입법권과 예산심의권·조약체결권 등을 부여하고 있으나 상원인 연방회의의 승인을 반드시 거치도록 규정하였다. 또 대통령이 법률안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3분의 2이상의 찬성이 있을 때만 이를 뒤집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에 반해 대통령은 총선거 실시권은 물론 국회해산권도 갖게 되어 있으며 의회의 대통령에 대한 견제는 거의 불가능해져 탄핵의 경우에 하원의원의 재적 3분의 2의 찬성으로 이를 확정하도록 하고 있다. 옐친 대통령은 1991년 11월 러시아 최고회의가 부여한 비상대권을 1년간 유지하면서 지속적인 시장경제 정책을 추구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경제가 악화됐다. 이를 계기로 옐친은 보수파의 온상인 최고회의와 인민대표회의의 심한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이후 옐친은 사사건건 인민대표회의와 최고회의의 견제를 받자 3권 분립을 명확히 하고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1993년 10월 의회를 해산했다. 이 과정에서 자체무장력을 갖추고 있던 의회보수파는 무력저항을 했으나 옐친은 군대를 동원해 진압했다. 동 12월에 실시된 의회 재선거에서는 보수파의 의석이 크게 줄어 옐친은 보수파를 제압했으나 많은 의석 확보에는 실패하여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가 이끄는 극우파와 공산당이 득세했다. 옐친 대통령과 인민대표회의간의 개혁정책 갈등은 1994년 10월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58.5%의 찬성으로 국민들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러시아 내에는 일당체제인 공산당 체제가 무너진 후 많은 정당들이 생겨났는데, 신헌법에 따라 1993년 12월 실시된 총선결과 러시아 하원 국가 두마선거에서는 친옐친계 예고르가이다르의 러시아의 선택당이 전체 450석 중 96석을 차지하여 최대 정당이 됐다. 그리고 극우파인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의 자유민주당이 70석, 공산당이 65석, 농민당 47석, 야블린스키연합 33석, 러시아 여성 25석, 러시아 민주당 21석, 시민동맹 18석, 민주개혁운동 8석, 존엄과 자선 3석, 러시아의 미래 1석, 기타 무소속이 30석을 차지했다. 러시아 선택당은 1994년 6월 당명을 러시아 민주선택당으로 바꿨다. 1996년 7월 3일에서 옐친은 53.8%를 득표해 승리하였다.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대선 후 건강악화로 1996년 11월 5일 심장수술을 받고 체르노미르딘 총리에게 전권을 일시 이양하였다. 그는 12월 23일 크렘린궁에 복귀해 리펑 중국 총리, 헬무트 콜 독일 총리 등과 회담하였는데 한편 러시아 하원은 1997년 1월말 옐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시도했으나 부결처리 되었다. 1997년 1월 교사 50만명이 체불입금지급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3월 27일 러시아 전역에서 노동자 총파업에 200만명이 참가했다. 1999년 12월 31일 옐친 대통령이 조기 사임하였고, 2000년 5월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직권남용죄(職權濫用罪)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행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하는 죄이다. 5년 이하의 징역과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대한민국 형법 제123조). 공무원이 그 직권을 남용하여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 작용의 엄정(嚴正)을 해하였다는 데에 본죄의 특질이 있으며 헌법적으로 주권자인 국민에 대해 봉사자인 공무원이 갑질하는 것을 예방하여 국민주권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헌정질서 수호를 목적으로 한다. 하지만 오랜 비민주적인 통치 권력이 집권하던 시기에 공무원에 의한 전횡적인 횡포가 잇따르자 1988년 6월 항쟁의 결실로 대통령 선거 직선제 등 민주화 개헌을 하면서 행정부 견제 수단으로 헌법재판소를 신설하면서 국민이 헌법재판소에 직접 '공권력 행사나 불행사에 의한 기본권 침해가 있은 때'에 헌법소원을 청구할 수 있게 하였는데 그 대상이 직권남용과 직무유기 범죄가 되는 내용이다.\n\n'직권의 남용'이란 형식적으로 일반직무권한에 속하는 사항에 대하여 자기의 직권을 남용하여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의무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권리행사를 방해하는 것으로서 예컨대 부당하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여 납부케 하는 경우도 포함한다.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하여 폭행·협박으로써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경우에는 본죄가 아니라 324조의 죄를 구성하며 그 처벌은 135조의 규정에 의하여 그 형의 2분의 1까지 가중한다. \n\n그러나 현실적으로 적용하여 처벌하는 것은 거의 없다. 특히 범죄 구성요건으로 \"강제성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마치 하여야 하는 것 처럼 지시하고선 추후에 강제성이 없어 직권남용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모순이 있고 무엇보다 검사의 독점적 기소 권한의 폐단 성격이 짙으며 사회적인 화제가 될 때 기소가 이루어진다.", "한미 관계\n\n이명박 대통령은 이미 여러 차례 “새로운 정부에서는 한미관계를 더욱 강화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실제로 한미관계는 더욱 강화될 것이라 보는 의견이 많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한미동맹 강화를 위해서는 미국 주도의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과 MD 계획에도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n\n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논란은 촛불집회로 비화되어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논란을 경험했다. 이때 이명박 정부는 미국과의 동맹강화를 위해 이러한 논란을 묵살하는 정책을 폈으며, 결과적으로 성공적으로 사태를 진압하여 한미관계 강화를 향한 일관된 원칙을 증명했다.\n\n이후, 2009년 미국의 새로운 오바마 행정부의 등장으로 외교관계는 일시적으로 정체되었다가, 현재는 정상회담을 통해 북핵문제에 대한 공조 및 G20 정상 회의 등에 대한 포괄적 합의를 하는 데에 이르렀다. \n\n2009년 11월 19일에는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방한했다. 여기서 이명박 한국 대통령과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한미동맹 강화 및 한미자유무역협정 협상의 진전을 위한 노력, 북핵 문제의 그랜드 바겐 방식 공감, 아프가니스탄의 한국군 파병 문제 논의 등이 이루어졌으며,‘동맹’ 실천계획 없는 “공감”… FTA 이견 재확인|url=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11191818365&code=910302|출판사=경향신문|저자=서의동|날짜=2009-11-19|확인날짜=2009-11-19}}</ref> 이명박 대통령이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태권도복을 선물하는 등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여기서 논의된 한미자유무역협정 자동차 부문 재협상 문제 와 아프가니스탄의 한국군 파병 문제는 대한민국 내에서 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두 정상의 미묘한 의견 불일치가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n\n2010년 6월 27일 캐나다 토론토에서 이명박 대통령과의 양자 정상회담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전시작전통제권을 2015년으로 연기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하면서“전작권 연기 결정을 통해 한·미 양국이 기존의 안보 틀 내에서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적절한 시간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한미동맹은 한국과 미국의 안보뿐 아니라 태평양 전체 안보의 핵심(Linchpin)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어 “한국은 미국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라고 언급했다.", "돌격대는 끊임없이 히틀러와 나치당 간부들에게 더 많은 권한과 권력을 요구하였다. 이에 히틀러는 무장친위대(SS)와 게슈타포 조직을 활용하여 돌격대를 토사구팽하였다. 히틀러는 돌격대의 사령관이었던 에른스트 룀과 다른 돌격대 지휘관들을 체포하였고, 체포한 이후에는 총살시켜 죽여버렸다. 1934년 7월 2일에는 200여 명이 넘는 돌격대와 관련된 사람들이 숙청당했으며, 이 사건을 장검의 밤이라고 부른다.\n\n1934년 8월 2일, 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힌덴부르크가 세상을 떠났다. 힌덴부르크가 죽기 바로 전날 내각은 '국가 최고 원수와 관련된 법'을 제정하였고, 힌덴부르크가 죽은 직후부터 대통령직을 폐지하고 대통령의 권한을 당시 히틀러가 맡고 있던 수상의 권한에 추가시키기로 합의하였다. 히틀러는 이로서 국가 최고 수반이 되었으며, 행정부 최고 수반인 동시에 국가 최고 명예인 '총통과 총리'직을 맡게 되었다. 다만 '총리'라는 명칭은 후에 사라졌다. 이 시기쯤 되자 독일은 히틀러의 완벽한 지배 하에 있는 전체주의 국가였고, 히틀러는 무력과 군력, 행정력을 완전히 장악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이 때 제정된 새로운 법들에는 공무원들이 국가나 헌법이 아닌, 히틀러 개인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하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그해 8월 19일, 국민 투표에서 대통령직의 권한을 수상에게 부여하는 내용의 법안이 90%의 지지를 받아 통과하였다.\n\n대다수의 독일인들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사회적 혼란상과 갈등이 일단 히틀러 치하에 종결되었다는 사실 자체에 안심하였다. 그들은 요제프 괴벨스가 지휘한 선전부의 선동에 깊이 빠져들었다. 괴벨스는 베르사유 조약 등의 굴레들을 벗어던지고 독일의 옛 명예를 회복할 것을 주장했으며, 평화와 번영을 보장하였기에 워낙 혼란스러운 상황을 살았던 독일인들이 이에 흠뻑 빠져들 수 있었던 것이다. 나치당은 경찰력을 증강시켰고, 법적 조치들을 임의대로 해석하여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렀고, 국가와 주의 정부 기관들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1933년 경에는 독일 다하우에 정치범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다하우 강제수용소가 처음으로 건립되었다.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곳에 수 백개의 캠프들과 기관들이 추가로 건설되었다.\n\n1933년 4월부터는 유대인들의 권리를 제한하고 상대적으로 사회적 지위를 낮추는 법안들이 대거 시행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1935년에는 유대인들의 기본권마저 박탈한 뉘른베르크법이 제정되었고, 나치당은 유대인들의 부를 강탈해갔으며 비유대인과 유대인 간의 결혼도 금지했다. 또한 유대인들이 법, 의학, 교육과 관련된 직업을 가지는 것도 금지하였다. 거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 시기에 직장을 잃었으며, 그 빈 자리들은 독일인 실업자들로 대거 교체되었다. 1938년 11월 9일 나치는 유대인 상점의 파괴를 실시했으며, 사건 당시 수많은 유리창이 깨졌다고 해서 수정의 밤 사건으로 불린다. 이 사건으로 1939년 9월까지 20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네덜란드, 미국, 남아메리카 등으로 도망쳤으며, 나치는 이들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였다. 결과적으로 나치는 유대인들이 독일 사회 내에서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비건은 1984년 미시간 대학교에서 러시아어와 정치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 1992년부터 1994년까지는 국제 공화주의 연구소의 러시아 모스크바 지국장으로 있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국장으로 재직하며 국가안보보좌관 콘돌리자 라이스를 보좌했고,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존 매케인의 부통령 후보 세라 페일린의 외교정책보좌관을 맡았다.\\n\\n2018년 3월 1일, 비건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국가안보보좌관 H. R. 맥매스터를 대신할 유력한 후보 가운데 하나라는 보도가 나왔으나 3월 22일에 존 볼턴이 H. R. 맥매스터를 대신할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취임했다. 8월 23일에는 미국의 국무장관 마이크 폼페이오가 비건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를 대표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관련된 정책을 이끌어 나갈 미국 국무부 대북 정책 특별대표로 임명했다. 9월 11일에는 대한민국을 처음으로 찾아 대한민국의 대통령 문재인을 접견하고 의견을 나누었다. \\n\\n2019년 2월 6일 비건은 2019년 2월 북미정상회담을 준비할 실무 협상을 위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했다. 8월에 CNN 등 미국 언론기관들은 도널드 트럼프가 비건을 주러시아 미국 대사로 고려하고 있다고 전했으나 비건은 8월 21일 대한민국을 찾아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이도훈과 협의를 가진 뒤 기자들에게 자신은 주러시아 미국 대사 자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관련해 진전을 만드는 데 집중할 것이라고 밝혔다. 10월 31일 도널드 트럼프는 주러시아 미국 대사로 지명된 존 J. 설리번 전 미국 국무부 부장관을 대체할 사람으로 비건을 지명했다. 12월 19일에 미국 상원은 비건의 국무부 부장관 인준안을 찬성 90표 대 반대 3표로 통과시켰고, 이틀 뒤 비건은 국무부 부장관으로 공식 취임했다.", "테드 크루즈 미국 공화당 상원 의원은 2014년 6월에 열린 제113차 미국 의회에서 간단한 결의안을 발의했고 프랭크 울프 미국 공화당 하원 의원도 주미국 중국 대사관의 도로명 주소를 중국의 반체제 인사인 류샤오보의 이름을 따서 바꾸자고 제안했다. 이렇게 되면 주미국 중국 대사관의 새 도로명 주소는 '류샤오보 광장 1번지(1 Liu Xiaobo Plaza)'가 된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미국 의회의 발의 단계에서 꼼짝 못하게 되었다. 영국 방송 협회(BBC)는 화춘잉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대변인이 미국 의원들의 움직임을 \"순전한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축했고 \"류샤오보가 중국에서 국내법을 위반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중국 정부의 입장을 다시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의 뉴욕 타임스는 화춘잉 대변인이 중국이 이에 대한 보복으로 주중국 미국 대사관의 도로명 주소를 바꿀 것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미소를 지으면서 \"중국이 미국과 똑같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수사적으로 물었다고 보도했다. 중국의 많은 네티즌들은 인터넷에서 댓글을 달면서 중국이 바로 그렇게 할 것을 제안했는데 여기에는 \"포로 학대(아부그라이브 교도소 가혹행위 사건) 거리\", \"에드워드 스노든 거리\", \"오사마 빈라덴 거리\", \"모니카 르윈스키 거리\" 등과 같은 제안된 거리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테드 크루즈 공화당 상원 의원은 2015년 11월 4일에 미국 의회에서 중국의 인권 문제를 놓고 다이앤 파인스타인 미국 민주당 상원 의원과의 설전을 벌였는데 다이앤 파인스타인 의원은 주미국 중국 대사관의 도로명 주소를 \"류샤오보 광장 1번지\"로 변경하는 법안에 반대했다. \\n\\n테드 크루즈 공화당 상원 의원, 마크 메도스 공화당 하원 의원은 2016년에 열린 제114차 미국 의회에서 이러한 노력을 계속하기 위해 주미국 중국 대사관의 도로명 주소에 관한 법안을 발의했다. 2016년 2월 12일에는 미국 상원이 크루즈 의원이 발의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미국 행정부는 2월 16일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주미국 중국 대사관의 도로명 주소에 관한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훙레이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대변인은 기자회견에서 \"중국은 미국의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정치적인 웃음거리를 끝낼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2월 23일에는 미국 하원 산하 감독 및 정부 개혁 위원회가 테드 크루즈 의원이 발의한 법안을 회부했지만 미국 하원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n\\n테드 크루즈 공화당 상원 의원, 마크 메도스 공화당 하원 의원은 2017년 5월 18일에 열린 제115차 미국 의회에서 주미국 중국 대사관의 도로명 주소 변경 추진을 재개하기 위해 법안을 재발의했다. 미국의 중국계 인권 운동가 겸 목회자인 밥 푸(Bob Fu)는 류샤오보가 사망한 이후인 2017년 7월 13일에 발행된 《텍사스 트리뷴》에서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 크루즈 의원이 발의한 법안이 제정되는 것에 훨씬 더 낙관적이다.\"라고 말했다. \\n\\n2020년에는 미국 공화당 소속 상원·하원 의원들이 주미국 중국 대사관의 도로명 주소를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에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 COVID-19)를 최초로 발견했다가 당국의 경고를 받았던 중국의 안과 의사이자 내부고발자인 리원량의 이름을 딴 \"리원량 광장\"으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리원량의 아내였던 푸쉐제(付雪潔)는 \"자신의 남편은 생전에 조국을 사랑했던 중국 공산당원이었다. 남편이 알았다면 그 누구도 자신의 이름을 이용하여 조국을 해치는 일을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면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잭슨 민주주의(Jacksonian democracy)는 미합중국의 대통령이었던 앤드루 잭슨과 그의 지지자들이 실천한 정치사상을 의미한다. 잭슨이 재임기간 펼친 정책들은 잭슨의 이전 시대를 풍미하던 제퍼슨 민주주의의 시대를 계승한 것들이었다. 잭슨과 그의 지지자들(이들은 오늘날의 미합중국 민주당의 전신이 된다.)은 재임기간 이전 및 재임기간 동안 그들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존 퀸시 애덤스와 반 잭슨주의자들이 이끌던 국가공화당(휘그당의 전신)에 의해 지속적으로 견제받아 왔다.\\n\\n잭슨의 임기 동안, 미국은 여러 가지 변화를 겪었다. 제퍼슨 민주주의의 시기와 달리, 잭슨 민주주의 하에서는 의회의 권한이 축소되고 대통령과 행정부의 권한이 대폭 강화되었다. 또한 잭슨은 평등주의를 강조하여 이와 관련한 정책들을 내놓았는데, 이 결과 잭슨 정부 기간동안 지주에게만 허락되었던 선거권이 모든 백인 남성에게 허락되는 등 대중의 권한이 크게 신장되었으며, 정부 활동에 대한 시민들의 참여폭도 넓어졌다. 사법 분야의 변화도 일어났는데, 잭슨 정부는 많은 주들의 주 헌법을 개정하여 주 법관들의 임기를 축소하고 공선제를 채택하는 한편, 배심제를 중시하고, 변호사와의 관계에서 법관의 권한을 약화시켰다. 특히 배심제에 대해서는 식민지시대 이래 인민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여겨 영국에 비해 그 권한을 크게 강화하였다. 한편 잭슨주의자들은 영토확장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데모크라틱 리뷰》지(誌)의 주필이던 존 오설리번에 의해 '명백한 운명'이란 독특한 논리로 정의되었다.\\n\\n노예 문제에 대해, 잭슨의 지지자들과 휘그당 사이에는 이를 논쟁거리로 삼지 말자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다. 이러한 합의는 1828년의 선거부터 1850년 이후에 노예 문제가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고 남북 전쟁에 의해 제3정당기가 등장하여 미 정계가 극적으로 재편될 때까지 지켜졌다." ]
[ 10598, 23901, 56145, 2283, 24320, 20890, 41828, 55722, 43026, 1281, 36404, 1752, 6306, 55724, 17791, 13391, 3345, 54884, 60556, 21210 ]
[ "내각", "미국의 대외 관계", "일본국 헌법 제41조", "정부 형태", "국가안전보장회의", "미국 합동참모본부", "미국 국가항공자문위원회", "러시아의 정치", "국가판무관부", "의회", "미국 관리예산실", "통일주체국민회의", "통일주체국민회의", "러시아의 정치", "직권남용죄", "이명박 정부", "나치 독일", "스티븐 비건", "주미국 중국 대사관", "잭슨 민주주의" ]
인사조직관리
'근대적 경영학' 또는 '고전적 경영학'에서 현대적 경영학으로 전환되는 시기는 1950년대이다. 2차 세계대전을 마치고, 6.25전쟁의 시기로 유럽은 전후 재건에 집중하고, 유럽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독립하여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에서 신생국가가 형성되는 시기였고, 미국은 전쟁 이후 경제적 변화에 기업이 적응을 해야 하던 시기였다. 특히 1954년 피터 드러커의 저서 《경영의 실제》는 현대적 경영의 기준을 제시하여서, 기존 근대적 인사조직관리를 넘어선 현대적 인사조직관리의 전환점이 된다. 드러커는 경영자의 역할을 강조하며 경영이 현시대 최고의 예술이자 과학이라고 주장하였고 , 이 주장은 21세기 인사조직관리의 역할을 자리매김했다.\n\n현대적 인사조직관리와 근대 인사조직관리의 가장 큰 차이는 통합이다. 19세기의 영향을 받던 근대적 경영학(고전적 경영)의 흐름은 기능을 강조하였지만, 1950년대 이후의 현대 경영학은 통합을 강조하였다. 기능이 분화된 '기계적인 기업조직' 이해에서 다양한 기능을 인사조직관리의 목적, 경영의 목적을 위해서 다양한 분야를 통합하여 '유기적 기업 조직' 이해로 전환되었다. 이 통합적 접근방식은 과정, 시스템, 상황을 중심으로 하는 인사조직관리 방식을 형성했다.
현대적 인사조직관리의 시발점이 된 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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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38
[ "인류 역사에서 무리를 지어 살기 시작하면서 조직이 시작되었다. 인류를 위한 다양한 조직이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조직으로 ‘군사조직’과 ‘종교조직’이 있다. 이 두 조직은 지금도 현대 경영에서 참조하는 영역이다. 현대 기업의 ‘경영전략’은 군사조직의 전략 이론에서 영향을 받아 발전한 것이고, ‘목표에 의한 관리’ 역시 기독교 수도원의 성직자의 자기 관리에서 발전한 것이다. 기업이 사용하는 ‘미션선언’ 역시 기독교의 신앙고백과 신조에서 발전한 형태이다. 신생 조직인 기업조직은 인류와 함께 한 조직에서 끊임 없이 배우고, 흡수해 왔으며, 독자적인 형태의 결과를 산출하고 있다.\n\n근대의 인사조직관리는 신생조직인 기업이 체계화하는 20세기 초에 다양한 시장을 경험하며 기업조직의 발전으로 단순한 경험으로 운영하던 기업관리의 한계가 나타나면서 체계적인 조직관리를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근대주의 영향 아래 20세기 초 근대적 인사조직관리의 연구가 진행되며, 과학적 경영이 작업자의 생산성을 높이는 관점에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일반관리론으로, 행동적 접근, 계량적 접근 방식으로 근대적 경영관리 이론이 등장하였다. 현대적 경영 연구에서 '통합적이고 상황을 지향하는 다양한 이론들이 등장하며 현대 인사조직관리의 연구가 진행된다.", "시스템 접근 방식은 1960년대 중반부터 등장한 인사조직관리의 전개 방식이다. 기업조직을 시스템구조로 이해하고 기업조직의 문제를 해결하고 했다. 시스템 접근 방식의 시스템은 기업조직의 각 부분이 상호 연관, 의존 부분을 지닌다고 보고, 심리학자들의 투입과 산출의 균형을 위한 설명이론이었던 시스템 이론을 인사조직관리 방식으로 도입하였다.\n\n시스템 구조는 크게 두 개로 개방시스템과 폐쇄시스템이다. 근대 인사조직관리의 기업조직 이해는 '폐쇄 시스템'적 접근으로 기업조직과 환경인 시장의 기능을 강조하는 기계적 이해방식이다. 현대 인사조직관리의 기업조직 이해는 '개방적 시스템' 접근으로 기업조직과 환경인 시장이 상호 영향을 주는 연관, 의존적 관계를 강조하는 유기적 이해 방식이다. 기업조직을 하나의 생명체로 전제하고, 내부 구성인 개인, 집단, 조직 역시 상호 의존적인 관련을 갖는다는 시각하에, 인사조직관리는 조직의 모든 요소를 조직 목표 달성을 위해 조정하는 역할이라고 본다.", "인사조직관리는 연구 초기부터 심리학, 사회학, 경제학, 행정학과 같은 관련 분야의 이론을 수용하였고, 현대 인사조직관리에 이르러서는 교육학, 해석학, 전자공학, 군사학 등과 기독교 신학 분야 연구를 추가로 수용하면서 성장하였다. 관련 학문의 이론을 수용하는 것만 아니라 경영관리의 연구가 관련 학문에 영향을 끼치는 상호 영향 관계가 되거나 두 분문의 통합되어 연구 분야를 형성하기도 하였다.\n\n심리학의 이론을 수용하던 인사조직관리와 심리학은 상호 영향 속에서 심리학을 중심으로 산업심리학의 분야가 형성되었고, 행정학과 초기 조직 이론과 막스 베버의 일반관리와 같은 이론을 함께 연구한 인사조직관리의 인적자원 분야는 행정학의 인사행정과 직간접으로 상호영향을 끼친다. 경제학 분야에서도 노동경제학의 경우 노사관계, 직무분석 이론 등과 같은 분야에서 상호 영향하에 있다. 군사학은 인사조직관리 분야인 경영전략에 영향을 끼쳤고 전략, 전술 부문의 이론을 경영학 토대에서 적극 수용하였으며, 인적자원관리 분야 이론을 군사학에 활용하기도 한다.\n\n인사조직관리는 경영학의 관련 학문과 연계하고, 이론을 수용하고, 상호 영향을 주며 발전하고 있다. 현대 인사조직관리는 인문, 사회분야의 이론과 기법만이 아니라 시장변화와 사회환경의 변화로 공학과 자연과학의 이론과 기법을 활용하거나 수용하며 학술적 범위를 확장하여 왔다.", "일반관리론은 직무를 넘어서 경영의 주제를 기업 조직의 전체로 확장시켰다. 과학적 경영의 프레더릭 테일러와 비슷한 시기의 인물인 앙리 페이욜과 막스 베버로 대표된다. 테일러의 작업관리의 미시적 접근인 과학적 경영 연구와 달리, 경영 실무자였던 프랑스 출신 페이욜은 일반적 경영 기능에 대한 경영관리를 경영자와 경영 실무자의 입장에서 '일반관리론'을 주장하였고, 독일 사회학자인 베버는 권한 관계를 중심으로 조직활동으로 '관료조직'을 주장 하였다.\n\n일반관리론은 현대 인사조직관리에서 경영이론과 경영실무기준을 형성하는 이론이 되었으며, 경영자의 업무의 기능젹 이해와 연구는 앙리 페이욜이 주장한 관리원칙을 바탕으로 한다. 베버의 거시 조직적 경영이해는 인사조직관리의 주요분야인 조직이론에 여전히 영향을 끼치고 있다.", "계량적 접근은 2차 대전 당시 군사 작전과 인력 배치, 군수물자 지원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수학과 통계적 방식을 도입하였고, 물자 공급과 제작 등을 수행한 기업들에게 전해져 경영관리 분야로 발전하였다. 영국의 부족한 공군 능력으로 독일 군에게 효과적으로 공격할 방안을 찾는 통계적 기법에서 발전한 '최적 할당 모형' 등이 등장하였다. 의사결정을 위한 통계적 기법, 작업일정 작성, 최적화 모형 등을 활용하여 계량적 인사조직관리를 하도록 하였다.\n\n통계적기법을 활용하는 '계량적 접근'은 현대 인사조직관리에서 경영의사결정과 자원배치 등에 영향을 끼쳤다.", "위의 세부분야 구분은 '연계성 수준' 정도를 따라 나눈 것으로 이해와 편의를 위한 구분이며, 정교한 구분은 하기 어렵다. 인사조직관리에서 ‘인사관리’와 ‘조직관리’ 분야는 초기부터 동일한 이론을 사용하거나 중첩되고, 유기적으로 결합된 부분들이 있다. 각 세부 분야는 인사관리와 조직관리가 강력하게 중첩된 경우와, 관련 주변학문과 연계성이 높은 경우와, 점차 독립적 학문 분야로 발전하는 분야의 경우도 있다. 경영전략은 1970년대 이후 조직관리의 한 부분로 시작하여 조직관리 분야만이 아니라 마케팅, 재무, 회계, 생산 분야까지도 그 영향력을 끼친다. 리더십 또한 조직관리의 조직행동에서 한 부분으로 시작되어 현재는 강력한 연구 분야이자 사회. 심리를 포괄하는 분야로 발전하였다. 위의 구분 이외에도 주변 관련 학문과 연계하며 인사조직관리의 연구 영역은 심화, 발전중이다.", "근대적 경영이론 또는 고전적 경영이론의 등장은 프레더릭 테일러의 연구가 출간된 1911년으로 본다. 신생 기업의 발전과 새로운 환경이 등장하며 이에 적응하기 위한 기업경영에 관심을 기울이며 등장한 이론이 경영학 이론의 시작이자, 인사조직관리 이론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경영학의 시초인 과학적 경영과 일반관리, 행동적 접근, 계량적 접근 이론이 근대적 경영관리 이론의 흐름이라 할 수 있다 \n\n근대적 인사조직관리 이론은 새로운 경영 방식을 제안하고, 새롭게 근대적 기업 조직으로 발전하도록 기여하였고, 경영을 이해하도록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하지만, 시대적 한계, 제한적 연구 방법 등으로 경영관리에 대한 유기체적인 이해보다는 기계론적 이해와 전체적인 조망보다는 부분적 조망이 이뤄진 이론들이다.", "시스템 접근 방식은 1960년대 중반부터 등장한 경영관리의 전개 방식이다. 기업조직을 시스템구조로 이해하고 기업조직의 문제를 해결하고 했다. 시스템 접근 방식의 시스템은 기업조직의 각 부분이 상호 연관, 의존 부분을 지닌다고 보고, 심리학자들의 투입과 산출의 균형을 위한 설명이론이었던 시스템 이론을 경영관리 방식으로 도입하였다.\n\n시스템 구조는 크게 두 개로 개방시스템과 폐쇄시스템이다. 근대 경영관리의 기업조직 이해는 '폐쇄 시스템'적 접근으로 기업조직과 환경인 시장의 기능을 강조하는 기계적 이해방식이다. 현대 경영관리의 기업조직 이해는 '개방적 시스템' 접근으로 기업조직과 환경인 시장이 상호 영향을 주는 연관, 의존적 관계를 강조하는 유기적 이해 방식이다.", "인사조직관리 또는 인사조직, 조직인사, 경영관리는 경영에서 업무수행을 효과적으로 행할 수 있게 경영조직을 체계적으로 운영하는 것으로 경영상에서의 각종 업무수행이 경영목적을 위하여 가장 효과적으로 행해질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시책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경영조직체를 만들어 이를 운영하는 일을 의미하며 , 경영에서 학술분야로 인적 자원과 조직을 관리하는 방식을 연구하는 분야를 인사조직관리라고 한다. 경영학의 기능적 5개 부분인 인사조직, 회계, 재무, 마케팅, 생산 중의 한 분야로 인적자원관리(인사관리), 인적자원개발(교육훈련), 노사관리, 조직론, 경영전략, 리더십, 의사결정, 윤리경영, 경영철학 등을 포함하는 분야이다.", "상황적합 접근 방식은 '경영 시스템' 접근 방식의 모호성을 극복하기 위해 기업조직의 성과에 영향을 주는 각종 변수를 측정하고 분석하는 방식이다. 이는 기업조직을 단순한 생명체 또는 유기체로 이해하는 기업조직 내부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기업조직에 영향을 주는 내부적, 외부적 요인인 '상황 변수'에 적응하는 접근방식이다.\n\n기업조직을 생명체로 본다면, 단순히 자기 중심적인 활동을 하지 않고, 처해진 상황적 변수에서 자신의 능력으로 가장 적합한 행동을 통해 목적을 이뤄야 한다. 인사조직관리가 처해진 외부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내부의 변수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경영성과를 얻을 수가 없다. 과거 근대적 인사조직관리에서 세부화된 직무와 생산성 강조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내부 결정 사항이므로, 역동적인 시장환경에 적응하지 못한다. 상황적합 접근 방식은 작업의 폭을 넓히고, 상황에 적응할 자율권을 부여할 때 생산성과 성과의 향상 가능을 주장한다. 이는 시스템 접근 방식의 한계인 의존 관계 정의를 더욱 분명하게 한다. 기업조직의 구성은 상호 의존적이라는 시스템적 사고에서 기업조직의 어떤 부분이 의존하고 있으며, 내부적 의존인지, 외부적 의존인지 분석하는 상황적합 사고는 직관적이고 경영문제를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근대적 경영관리' 또는 '고전적 경영관리'에서 현대적 경영관리로 전환되는 시기는 1950년대이다. 2차 세계대전을 마치고, 한국전쟁의 시기로 유럽은 전후 재건에 집중하고, 유럽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독립하여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에서 신생국가가 형성되는 시기였고, 미국은 전쟁 이후 경제적 변화에 기업이 적응을 해야 하던 시기였다. 특히 1954년 피터 드러커의 저서 《경영의 실제》는 기존 근대적 경영관리를 넘어선 현대적 경영관리의 전환점이 된다 . 드러커는 경영자의 역할을 강조하며 경영이 현시대 최고의 예술이자 과학이라고 주장하였고 , 이 주장은 21세기 경영관리의 역할을 자리매김했다.\n\n현대적 경영관리와 근대 경영관리의 가장 큰 차이는 통합이다. 19세기의 영향을 받던 근대적 경영관리(고전적 경영관리)의 흐름은 기능을 강조하였지만, 1950년대 이후의 현대 경영학은 통합을 강조하였다. 기능이 분화된 '기계적인 기업조직' 이해에서 다양한 기능을 경영관리의 목적, 경영의 목적을 위해서 다양한 분야를 통합하여 '유기적 기업 조직' 이해로 전환되었다. 이 통합적 접근방식은 과정, 시스템, 상황을 중심으로 하는 경영관리 방식을 형성했다.", "근대의 경영관리는 신생조직인 기업이 체계화하는 20세기 초에 다양한 시장을 경험하며 기업조직의 발전으로 단순한 경험으로 운영하던 기업관리의 한계가 나타나면서 체계적인 조직관리를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근대주의 영향 아래 20세기 초 근대적 경영관리의 연구가 진행되며, 과학적 경영이 작업자의 생산성을 높이는 관점에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일반관리론으로, 행동적 접근, 계량적 접근 방식으로 근대적 경영관리 이론이 등장하였다. 현대적 경영관리 연구는 '통합적이고 상황을 지향하는 다양한 이론들이 등장하며 현대 경영관리의 연구가 진행된다.", "인사조직관리는 경영에서 업무수행을 효과적으로 행할 수 있게 경영조직을 체계적으로 운영하는 것으로 경영상에서의 각종 업무수행이 경영목적을 위하여 가장 효과적으로 행해질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시책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경영조직체를 만들어 이를 운영하는 것을 의미한다.\n\n인사조직관리는 기업 조직의 고유 목적을 위해서 형성하는 조직의 구성 요소인 개인(individual), 집단(group), 조직(organization)의 관리 및 경영을 위한 관련 연구와 조직적용 방법과 결과 예측 과정의 전반을 의미한다. 학자마다 범위와 주요 요소에 대한 주장이 다르나 위의 3가지 사항에 관련된 분야의 범위를 다룬다. 경영관리는 시장환경에서 기업조직이 어떻게 지속 가능할지에 대해서 기업 전반의 경영을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경영학 분야이고, 기업을 이루는 개인, 집단, 조직 범위에서 이뤄진다.", "행동적 접근은 인간의 행동을 바탕으로 경영을 이해하고 경영관리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기업 조직 내에서 작업자의 숙련과 능력을 다양한 욕구와 결합하여 연구하였고, 점차 조직은 개인과 집단 행동의 배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1924년부터 1932년까지 이어진 호손공장 연구로 결정을 지었다. 이 연구를 진행한 메이요는 조직내에서 업무와 같은 행동은 감정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며, 집단은 개인의 행동에 영향을 끼친다는 결론을 내렸다.\n\n'호손공장 연구'의 목적은 조명과 작업자의 능률 조사였다. 하지만 연구가 시작되자,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도 생산성이 향상되었고, 조명을 달빛 수준으로 조절해도 생산성은 떨어지지 않았다. 원인은 작업자들이 자신들이 우수한 사원으로 선택되어 조사 대상이 되었다는 자부심으로 행한 작업 결과 탓이었다. 작업에는 조명도 필요하지만, 자부심을 지닌 작업자가 생산적인 작업자라는 결론을 내려야 했다.\n\n행동적 접근 연구는 작업자가 기계의 부품이라는 근대의 인식에서 벗어나 작업자의 감정이, 즉 인적 요인이 작업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경영관리 상식이 되도록 이끌었다. 비록 행동적 접근 연구 역시 실험 과정과 결과 분석이 현대의 방법과 현격한 수준 차이를 보이지만, 행동적 접근 연구는 인사조직관리가 종업원의 직무만족도, 사기 등의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보여준 연구였다.", "스포츠의학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고대 로마 시대의 의사이자 해부학자인 클라우디오스 갈레노스이다. 그는 소아시아의 페르가몬에서 태어나 200년 사망할 때까지 해부학과 생리학 등에 수많은 의학적 공헌을 남겼다. 또한 당시 전사들의 주치의로 임명되어 스포츠 외상의 처치법을 개발하고 건강관리를 하여 현대 스포츠에 존재하는 팀닥터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후반부터는 과학문명이 급속도로 발달함에 따라 스포츠의학도 이러한 과학적 발판 위에서 연구되기 시작하였고, 특히 근육의 생리학적 연가 활발해졌다. 1910년에는 지그프리드 바이스바인이 베를린에서 『스포츠 위생』이라는 책을 발간하였는데 이것이 과학적 스포츠 의학의 탄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n또한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스포츠의 의학적 연구가 세계 각지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였다. 1928년에는 스위스 남동부의 스키장인 장크트 모리츠에서 개최된 제2회 올림픽 동계대회를 계기로 국제스포츠의학연맹(FIMS: fédération internationalede medicin sportive)이 결성되었으며, 같은 해에 암스테르담 올림픽대회에서 제1회 국제스포츠의학회가 개최되어 이때부터 스포츠의학의 연구는 국제적 규모로 변모하였고, 이 시기가 현대 스포츠의학연구의 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과학적 관리(과학적 경영)은 프레더릭 윈즐로 테일러의 《과학적 경영의 원리》가 출판된 해인 1911년에 등장한다. 생산 기술자였던 테일러는 저서에서 과학적 경영의 필요성을 밝히며, 최선의 경영 원리를 과학적으로 정의 내렸다. 근대 경영학의 시작이며, 작업자의 작업을 분석하여 얻은 이론이었다. 과학적 경영은 생산 증대를 위해 지침을 정하고, 작업자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작업 도구의 제작, 작업 방식의 고안을 주장하였다. 체계화된 시간 관리와 직무의 정의, 도구의 적합성을 강조하여 작업 생산성에 집중한 경영관리 이론이다. 과확적 관리 이론에 따른 인사조직관리는 작업자의 직무 분석, 작업자의 효율과 조직행동을 효율적 측면에서 연구하였다.", "기획조정실, 감찰실, 정보관리실, 총무관리실(또는 총무관리국)은 독립된 실이고 그밖의 실은 1,2,3차장 또는 운영차장의 예하에 존재하였다. 기획조정실에는 기획조정국과 각 국이 있고, 총무관리실 예하에는 총무국과 각 국, 총무국 예하에는 인사과가 있다. 총무국 인사과의 보임계장은 계장급이지만 기획조정실장에 버금가는 막강한 위치였다.\n\n각 차장 예하에는 실과 국이 있고, 실과 국 예하의 단은 예를들어 대공정책실이면 대공정책 1단, 2단, 해외공작국 예하 단이면 해외공작 1단, 2단, 8단 등의 이름붙였다. 단 아래에는 직할의 행정과와 처가 존재하였고, 처 아래에는 각 과가 존재하였다. 각 실국에는 실장과 부실장, 국장과 부국장이 존재한다. 실국장은 관리관, 부실장과 부국장, 단장은 이사관급, 처장과 과장은 부이사관급으로 보하였다. 계장급은 서기관이었다.", "상황적합 접근 방식은 '경영 시스템' 접근 방식의 모호성을 극복하기 위해 기업조직의 성과에 영향을 주는 각종 변수를 측정하고 분석하는 방식이다. 이는 기업조직을 단순한 생명체 또는 유기체로 이해하는 기업조직 내부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기업조직에 영향을 주는 내부적, 외부적 요인인 '상황 변수'에 적응하는 접근방식이다.\n\n기업조직을 생명체로 본다면, 단순히 자기 중심적인 활동을 하지 않고, 처해진 상황적 변수에서 자신의 능력으로 가장 적합한 행동을 통해 목적을 이뤄야 한다. 경영관리가 처해진 외부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내부의 변수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경영성과를 얻을 수가 없다. 과거 근대적 경영관리에서 세부화된 직무와 생산성 강조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내부 결정 사항이므로, 역동적인 시장환경에 적응하지 못한다. 상황적합 접근 방식은 작업의 폭을 넓히고, 상황에 적응할 자율권을 부여할 때 생산성과 성과의 향상 가능을 주장한다. 이는 시스템 접근 방식의 한계인 의존 관계 정의를 더욱 분명하게 한다. 기업조직의 구성은 상호 의존적이라는 시스템적 사고에서 기업조직의 어떤 부분이 의존하고 있으며, 내부적 의존인지, 외부적 의존인지 분석하는 상황적합 사고는 직관적이고 경영문제를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해답을 찾을 수 있다.", "1934년 7월 10일, 멘진스키가 죽은 지 2달 만에 야고다를 내무인민위원장으로 임명되었는데 야고다는 도박과 엽색행각으로 악명을 떨쳤다. 또한 이후 그가 숙청될 때 멘진스키를 독살했다는 항목이 죄목에 있었다는 것으로 볼 때, 세르게이 키로프의 암살에도 그가 개입했다는 의혹이 있다.\n\n야고다는 스탈린의 대숙청의 시발점이 된 1936년 지노비예프 등이 기소된 첫 번째 모스크바 각본 재판을 연출하였고 또한 강제수용소인 굴락을 처음으로 설립했다. 그러나 1936년 야고다는 내무인민위원회의 위원장직에서 해임되었고 그 뒤를 니콜라이 예조프가 이어 대숙청을 실행하였다.", "『녹색서』(綠色書, الكتاب الأخضر|알키타브 알아흐다르 al-Kitāb al-Aḫḍar)는 리비아의 국가 원수 무아마르 카다피가 쓴 책으로 초판은 1975년에 나왔다. 자신의 민주주의에 관한 가치관과 정치 철학을 피력하고 있는 책이며 제3세계 이론(Three Worlds Theory)을 참고하였다.\n\n책은 총 3장(민주주의가 가지는 문제 해결: \"인민의 권위\", 경제 문제의 해결책: \"사회주의\", \"세계 제3이론\"(제3인터내셔널 이론의 사회적 기초))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3인터내셔널 이론(Third International Theory, Third Universal Theory)은 대리비아 아랍 사회주의 인민 자마히리야국 정권에서 펼쳐진 이론으로 카다피가 1970년대 초에 제창한 것이다.\n\n부분적으로 이슬람 사회주의와 아랍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 이론은 자본주의가 결함이 있는 이데올로기라고 주장하고 제3세계 국가를 위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보편적인 체제를 제안하였다. 또한 제3인터내셔널 이론의 철학적 기초의 대부분은 꾸란에 의거하고 있다.\n\n이 책에서 카다피는 현대의 서구민주주의를 전면 부정하고 전 인민이 출석하는 인민회의를 바탕으로 한 직접 민주제를 권장하였다. 대리비아 아랍 사회주의 인민 자마히리야국에서는 이에 따라 헌법, 의회, 정당, 원수 등을 폐지하고 인민회의가 정부의 직무를 맡고 있었다. 또한 헌법 대신 인민 주권 확립 선언이 제정되어 이슬람교의 율법인 샤리아가 주요 법률의 원천이 된 바 있다.\n\n리비아의 해외 반체제 인사들은 이러한 인민회의는 직접 민주주의의 무대가 아니라 군사 독재의 추인(追認)과 인민 억압의 장소가 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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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사조직관리", "인사조직관리", "인사조직관리", "인사조직관리", "인사조직관리", "인사조직관리", "인사조직관리", "경영관리", "인사조직관리", "인사조직관리", "경영관리", "경영관리", "인사조직관리", "인사조직관리", "스포츠 의학", "인사조직관리", "대한민국 국가안전기획부", "경영관리", "겐리흐 야고다", "녹색서" ]
강희제
강희제는 강화된 황권으로 거의 황제 중심의 독단적으로 나라를 이끌어 갔기에 자칫 전제 독재의 가능성이 보일 수도 있었으나, 스스로 황권을 조절하고 정치의 일부는 재상들이나 대신들과 의논하였으며 당시 궁핍하게 살고 있는 한족들의 사정을 잘 알고 있던 한족 대신들의 의견을 수용하여 정책을 실행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프랑스의 예수회 선교사 부베는 루이 14세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n강희제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군주입니다. 그럼에도 황제인 그의 생활용품들은 사치스러움과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못해 소박하기 그지없습니다. 역대 제왕들 가운데 전례없는 일입니다.\n강희제 스스로도 자신이 직접 쓴 《근검록》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n모든 비용은 백성들의 피땀으로 얻어진 것이니 주인된 황제로서 절제하고 절제함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n\n이런 강희제의 인자한 정치는 한족이 만주족의 청나라를 지지하게 만드는 데에 크게 일조하였다. 1717년(강희 56년) 강희제는 〈고별상유〉(告別上諭), 즉 마지막으로 백성들에게 바치는 글을 남겼는데 강희제는 “한 가지 일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온 천하에 근심을 끼치고, 한 순간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천추만대에 우환거리를 남긴다.”라고 역설하였다. 또한 “제왕이 천하를 다스림에 능력이 있는 자를 가까이 두고, 백성들의 세금을 낮추어 주어야 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고, 위태로움이 생기기 전에 나라를 보호하며, 혼란이 있기 전에 이를 먼저 파악하여 잘 다스리고, 관대하고 엄격함의 조화를 이루어 나라를 위한 계책을 도모해야 한다.”라고 후대의 황제에게도 이를 훈계하였다. 강희제는 황제로서 자식과 같은 백성들에게 이런 당부의 말을 남겨 황제로서의 도리를 다하려 하였다.
강희제가 1717년에 쓴 글은 누구를 위해 쓰여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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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28
[ "몽골 초원은 홍타이지 이후 청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조공을 올리고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이미 1675년(강희 14년) 차하르 부족이 당시 삼번의 난으로 청나라에 생긴 혼란을 틈타 중원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노한 강희제는 몽골을 내몽골과 외몽골로 나누어서 부족 간의 규합을 막으려 하였다. \n\n몽골이 청나라에 복속된 지 수십 년이 지나고, 몽골의 여러 부족 중 일부는 절대 복종하고 일부는 표면적으로나마 청나라에 충성을 바쳤다. 그러나 그중 몽골의 한 부족인 오이라트 부족에 뿌리를 둔 초로스 칸가 출신의 중가르 부족의 칸인 갈단이 세력을 모아 몽골과 티베트를 통일하여 라마 제국을 건설할 포부를 품고 청나라에 대항할 조짐을 보였다. 이미 갈단은 1677년(강희 16년) 오이라트 부족을 통합하고 1682년(강희 21년)에는 타림 분지까지 점령하였다. 그런 다음 이들은 동투르키스탄을 점령하였고 이제 청나라가 다스리는 중원을 노렸다. 준가르는 자신들이 군사를 일으킨 명분으로 옛 원나라의 대칸은 만주인이 아닌 몽골인으로 옹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준가르는 청나라를 견제한 러시아와 티베트에 원조를 받기도 하였는데 심지어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5세는 갈단에게 보슈그투 칸, 즉 대칸의 직함을 내렸다.\n\n 또한 1688년(강희 27년), 준가르는 몽골 초원의 다른 부족인 할하 부족의 땅을 점령하고 거의 모든 부족민을 죽였다. 살아남은 할하족은 고비 사막을 넘어 강희제에게 군사적 원조를 요청하였다. 준가르의 군사들이 청나라의 영토를 침략하자, 1690년(강희 29년) 7월 강희제는 자신의 이복형이자 순치제의 차남 유친왕 복전(裕親王 福全)과 이복동생이며 순치제의 5남 공친왕 상녕(恭親王 常寧) 등을 대동하고 친히 팔기군을 이끌고 몽골로 원정길에 올랐다. 이것은 명나라의 영락제 이후 황제가 최초로 친히 고비 사막을 넘어 몽골 원정을 감행한 원정이며 중국 역사상 황제가 군사를 이끌고 나간 마지막 친정이었다. 강희제는 울란 부퉁에서 갈단의 군대와 마주쳤다. 이 원정에서 강희제는 할하족의 공식적인 합병 서약과 충성 서약을 받았다. 강희제는 몽골의 복속에 매우 만족하여 \"옛날의 진은 돌과 흙으로 만리장성을 쌓았지만 짐은 객이객에게 은혜를 배풀어 그보다 더 견고한 성을 쌓았다\"고 말했다. \n\n뒤이어 청군은 준가르군과 내몽골에서 맞붙었으나 전염병과 계속되는 패배로 사령관이었던 이복 형제들에게 책임을 묻고 군사를 물려 북경으로 환도하였다. 강희제 자신도 전염병에 걸려서 한동안 고생하였다. 그러나 1696년(강희 35년)에 강희제는 8만의 팔기군 군사를 이끌고 몽골로 진입, 차오모도 전투에서 준가르군과 싸워 대승하였다. 패한 갈단은 이듬해인 1697년(강희 36년)에 알타이 산맥 기슭에서 음독자살하였다. \n\n강희제 치세 후기인 1712년(강희 51년), 강희제는 준가르 부족을 견제하기 위해 만주 귀족 툴리센을 남러시아 볼가강 하류에 살던 투르구트(Torghut)족에게 사절로 보냈다. 이러한 강희제의 강한 견제에도 준가르 부족은 여전히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며, 1717년(강희 56년)에 준가르 부족의 신임 칸이자 갈단의 조카 체왕 아랍단은 6천 명의 적은 군사를 이끌고 과거 동맹이었던 티베트를 점령하였다. 준가르군은 수장 달라이 라마라 칭하던 티베트의 왕 랍장을 폐위시킨 뒤 살해하였고 1718년(강희 57년)에 청군을 격파하였다\n\n준가르군은 여전히 그 세력이 막강하였으나 1720년(강희 59년)에 강희제가 보낸 팔기군의 대대적인 원정에 준가르군은 결국 패퇴하였고 티베트에 원정 온 체왕 아랍단은 몽골로 돌아가 은둔하였다. 그 이듬해인 1721년(강희 60년)에 청군은 켈장 갸초를 모시고 와서 제7대 달라이 라마로 만들고 티베트를 청나라의 영토에 정식 편입시켜 티베트는 안정되었다. 하지만, 준가르 세력은 청군의 티베트 원정 이후 결정타를 맞았으나 완전히 멸하지는 않았다. 강희제의 손자인 건륭제 때에야 위구르와 함께 청군에게 항복하여 그 세력이 완전히 와해되었다.", "몽골 초원은 홍타이지 이후 청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조공을 올리고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이미 1675년(강희 14년) 차하르 부족이 당시 삼번의 난으로 청나라에 생긴 혼란을 틈타 중원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노한 강희제는 몽골을 내몽골과 외몽골로 나누어서 부족 간의 규합을 막으려 하였다. \\n\\n몽골이 청나라에 복속된 지 수십 년이 지나고, 몽골의 여러 부족 중 일부는 절대 복종하고 일부는 표면적으로나마 청나라에 충성을 바쳤다. 그러나 그중 몽골의 한 부족인 오이라트 부족에 뿌리를 둔 초로스 칸가 출신의 중가르 부족의 칸인 갈단이 세력을 모아 몽골과 티베트를 통일하여 라마 제국을 건설할 포부를 품고 청나라에 대항할 조짐을 보였다. 이미 갈단은 1677년(강희 16년) 오이라트 부족을 통합하고 1682년(강희 21년)에는 타림 분지까지 점령하였다. 그런 다음 이들은 동투르키스탄을 점령하였고 이제 청나라가 다스리는 중원을 노렸다. 준가르는 자신들이 군사를 일으킨 명분으로 옛 원나라의 대칸은 만주인이 아닌 몽골인으로 옹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준가르는 청나라를 견제한 러시아와 티베트에 원조를 받기도 하였는데 심지어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5세는 갈단에게 보슈그투 칸, 즉 대칸의 직함을 내렸다.\\n\\n 또한 1688년(강희 27년), 준가르는 몽골 초원의 다른 부족인 할하 부족의 땅을 점령하고 거의 모든 부족민을 죽였다. 살아남은 할하족은 고비 사막을 넘어 강희제에게 군사적 원조를 요청하였다. 준가르의 군사들이 청나라의 영토를 침략하자, 1690년(강희 29년) 7월 강희제는 자신의 이복형이자 순치제의 차남 유친왕 복전(裕親王 福全)과 이복동생이며 순치제의 5남 공친왕 상녕(恭親王 常寧) 등을 대동하고 친히 팔기군을 이끌고 몽골로 원정길에 올랐다. 이것은 명나라의 영락제 이후 황제가 최초로 친히 고비 사막을 넘어 몽골 원정을 감행한 원정이며 중국 역사상 황제가 군사를 이끌고 나간 마지막 친정이었다. 강희제는 울란 부퉁에서 갈단의 군대와 마주쳤다. 이 원정에서 강희제는 할하족의 공식적인 합병 서약과 충성 서약을 받았다. 강희제는 몽골의 복속에 매우 만족하여 \"옛날의 진은 돌과 흙으로 만리장성을 쌓았지만 짐은 객이객에게 은혜를 배풀어 그보다 더 견고한 성을 쌓았다\"고 말했다. \\n\\n뒤이어 청군은 준가르군과 내몽골에서 맞붙었으나 전염병과 계속되는 패배로 사령관이었던 이복 형제들에게 책임을 묻고 군사를 물려 북경으로 환도하였다. 강희제 자신도 전염병에 걸려서 한동안 고생하였다. 그러나 1696년(강희 35년)에 강희제는 8만의 팔기군 군사를 이끌고 몽골로 진입, 차오모도 전투에서 준가르군과 싸워 대승하였다. 패한 갈단은 이듬해인 1697년(강희 36년)에 알타이 산맥 기슭에서 음독자살하였다. \\n\\n강희제 치세 후기인 1712년(강희 51년), 강희제는 준가르 부족을 견제하기 위해 만주 귀족 툴리센을 남러시아 볼가강 하류에 살던 투르구트(Torghut)족에게 사절로 보냈다. 이러한 강희제의 강한 견제에도 준가르 부족은 여전히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며, 1717년(강희 56년)에 준가르 부족의 신임 칸이자 갈단의 조카 체왕 아랍단은 6천 명의 적은 군사를 이끌고 과거 동맹이었던 티베트를 점령하였다. 준가르군은 수장 달라이 라마라 칭하던 티베트의 왕 랍장을 폐위시킨 뒤 살해하였고 1718년(강희 57년)에 청군을 격파하였다\\n\\n준가르군은 여전히 그 세력이 막강하였으나 1720년(강희 59년)에 강희제가 보낸 팔기군의 대대적인 원정에 준가르군은 결국 패퇴하였고 티베트에 원정 온 체왕 아랍단은 몽골로 돌아가 은둔하였다. 그 이듬해인 1721년(강희 60년)에 청군은 켈장 갸초를 모시고 와서 제7대 달라이 라마로 만들고 티베트를 청나라의 영토에 정식 편입시켜 티베트는 안정되었다. 하지만, 준가르 세력은 청군의 티베트 원정 이후 결정타를 맞았으나 완전히 멸하지는 않았다. 강희제의 손자인 건륭제 때에야 위구르와 함께 청군에게 항복하여 그 세력이 완전히 와해되었다.", "1943년 초, 마리아 발토르타가 9년 간 건강 상태가 안 좋아졌을 때, 그녀의 고해사제이자 영적 조언자였던 밀리오니 신부가 그녀에게 자서전을 한번 써보라고 충고하였다. 처음에는 주저하던 마리아는 이윽고 그의 의견에 동의하여 약 2개월 후에 수백페이지의 글을 손수 집필하였다.\n\n1943년 4월 23일 성금요일 아침, 마리아 발토르타는 침상에 누운 채 마르타 디초티를 불러, 갑자기 자신에게 자기가 말해주는 대로 받아 글을 쓰라는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말하였다. 마르타는 마리아가 듣는다는 그 정체불명의 목소리에 대해 밀리오니 신부에게 말해주었다. 밀리오니 신부는 곧바로 마리아에게 와서 그녀에게 목소리의 지시에 따라 그대로 받아 적으라고 말해 주었고, 그녀가 받아 적을 노트를 계속해서 보내주었다.\n\n그리하여 마리아는 1947년까지 매일같이 목소리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 적었으며, 1947년부터 1951년까지는 간간이 받아 적었다. 마리아는 자신의 무릎 위에 수첩을 올려놓고 만년필로 글을 쓰곤 하였다. 그녀는 목차를 만들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자신이 대체 무슨 글을 쓰고 있는지 본인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나중에 글을 교정하기 위해 자신이 쓴 글을 다시 읽어보지도 않았다. 이따금씩 마리아는 마르타에게 요청하여 자신이 쓴 글을 낭독해달라고 하곤 하였다. \n\n마리아 발토르타는 자신이 쓴 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단언하였다.\n:“나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 순전히 나 혼자서 글을 썼으며, 심지어 글을 쓰는 와중에도 종종 내가 지금 쓰는 글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n\n그녀의 수첩에는 글을 쓴 날마다 해당 날짜가 기록되어 있다.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마지막 장의 몇몇 글은 앞장의 글보다 먼저 쓰여 있다는 점에서 그녀의 글은 순서대로 기재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으나, 중간에 있는 글을 통해 앞부분과 뒷부분이 연결되어 무난한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설명=강희제의 죽음 이후 공석인 황위 상태와 황위 집권 과정에 대해서는\n 1722년(강희 61년) 5월 4일 강희제는 자신의 68번째 생일을 맞는 것을 기념하여 65세 이상의 만주족, 한족, 몽골족, 회족 현직 관리들 및 퇴직 관리들 1천여 명을 자금성 건청궁(乾淸宮)에 초대하여 큰 주연을 베풀었다. 이것이 바로 천수연(千叟宴)이다. 천수연은 이미 1713년(강희 52년) 강희제의 나이가 육순이 넘은 것을 기념하여 자신의 동년배인 대신들을 불러 축하를 해주었다. 그 이후 두 번째로 열린 이 천수연에선 3000명 정도의 각기 다른 민족 출신의 신하들을 불러모았다. 천수연에서 강희제는 이들 전직 재상들과 대신들, 원로 관리들과 함께 강희 시대의 성공과 완성을 자축하였다. 이후, 천수연은 손자인 건륭제도 여러 번 베푸는 등 궁중의 주요 행사가 되었다. 천수연을 베푼 강희제는 곧 병에 걸렸고, 황위를 노리는 황자들은 이를 호기로 삼아 점점 세력을 확장하였다. 얼마 뒤인 1722년(강희 61년) 12월 20일에 이궁인 창춘원(暢春園)에서 붕어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69세였다.\n\n강희제의 정식 사인은 오한과 호흡 곤란이라 하나, 일설에 따르면 강희제의 병세는 그리 심하지 않았고 며칠 뒤에 돌연사했다 하여, 여전히 강희제의 죽음에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강희제 붕어 당시 강희제를 모신 신하가 야심 많은 4남 윤진의 휘하이자 자신의 외사촌동생이며 자신의 세 번째 황후인 효의인황후의 동생 구문제독 겸 보군통령 융과다(隆科多)라는 점으로 강희제가 윤진의 사주로 융과다에게 독살당하였다는 설도 있다. 본래 융과다는 8남 윤사의 수하였으나 윤진의 설득과 매수로 결국 윤진의 수하로 들어갔다.\n\n능호는 경릉(景陵)으로 부황 순치제의 황릉인 효릉(孝陵) 옆에 있으며, 청동릉(淸東陵)의 하나이다. 묘호는 성인의 뜻으로 국가를 다스려 진정으로 통일시킨 큰 업적이 있는 황제라 하여 성조(聖祖), 시호는 생전에 강희제가 인과 덕을 중시한 것을 따 인황제(仁皇帝)로 명명하였다. 정식 시호는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로 이 긴 시호에서도 그의 업적을 확인할 수 있다. ‘합천’(合天)은 분열된 천하를 다시 통일시켰다는 뜻이고 ‘홍운’(弘運)은 국운을 크게 넓혔다는 뜻이다. ‘문무’(文武) 역시 나라의 기틀을 잡고 문과 무를 고루 이용하여 전성기를 이룩한 황제에게 올리는 시호로 나라를 세운 개국 황제에게 올려지는 ‘고’(高) 자와 더불어 황제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시호이며 그리고 ‘중화’(中和)와 ‘대성’(大成)은 청나라를 중흥시켜서 나라를 더욱 번창시키고 여러 민족을 하나로 모아 크게 이루었다는 뜻이 담겨 있다.\n\n \n강희제 붕어 후, 8황자 패륵 윤사, 9황자 패자 윤당, 10황자 돈군왕 윤아 등은 훗날 목숨이 위태로울까 봐 그들의 넷째 형 윤진이 황위에 오르는 것에 절대 반대하여 그 대안으로 역시 ‘4’자가 붙어 있는 14황자 대장군왕 윤제를 후계자로 우겼으나 강희제의 전위 조서에는 후계자가 4남 윤진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당시 강희제의 유조의 내용 중 황위 승계에 대한 내용을 보면 이렇다. 제4황자 옹친왕 윤진은 인품이 귀중하고 사려가 깊으니 짐이 생각하건대 필히 대통을 이을 자격을 갖추었다. 고로 짐이 죽은 후 짐의 뒤를 이어 즉시 황제의 자리를 잇도록 하고 예법에 따라 상복을 입다가 27일에 평복으로 갈아입고 새 황제의 즉위를 만천하에 알려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알게 하라. \n그리고 4황자 옹친왕 윤진은 유조에 쓰여 있는대로 황위에 오를 명분을 세우고 자신의 이복동생이자 강희제의 13남 윤상에게 원래 윤사의 파가 장악하고 있는 북경 근교의 풍대병영의 군사를 포섭·동원하도록 명령하고 이 군사들을 동원해 반대 세력을 모두 제거하고 황위에 오르니, 이가 청의 제5대 황제인 옹정제이다. 그러나 옹정제가 황제에 오른 이유는 유조개위설, 개조찬위설, 무조탄위설 등 여러 설로 나뉘어 있는데, 일단 당시 강희제는 황위를 물려주려면 당사자인 옹정제를 직접 불러서 황위를 넘긴다는 얘기를 했어야 하나 옹정제나 다른 황자들 및 중신들에게 말하지 않고 곁에 있던 융과다에게만 말을 하였다 한다. 또한 만약 옹정제를 후계자로 점찍었다면 옹정제에게 황위를 잘 부탁한다는 얘기를 하기는커녕 자신의 병세에 대해서만 얘기를 하였다. 다른 유명한 가설로는 옹정제의 명령으로 융과다가 강희제가 원래 점찍어 놓은 ‘14황자 윤제에게 물려준다’(傳位十四皇子) 대신 ‘4황자 윤진에게 물려준다’(傳位于四皇子)라고 교묘히 바꾸고 조작된 이 유조를 공포하여 황위에 올랐다는 설이다\n\n\n그러나 이러한 가설은 2013년 9월 4일 중국의 뉴스 포털사이트 텅쉰왕(騰訊網)에 따르면 중국 랴오닝(遼寧)성 문서보관소는 2일 역대 처음으로 강희제의 유조를 공개했는데 이 유조는 만주어와 몽골어로도 쓰여 있어 한자 몇 글자 고치는 유조 조작으로는 그 내용을 바꾸기 어렵게 돼 있다고 한다. 이로써 옹정제가 무려 291년 만에 황위찬탈 혐의를 벗었다.", "지정은제는 청나라 때 시행된 조세제도로, 정세(丁稅) 를 지세에 합쳐 지세(地稅)만 납부하게 한 은본위제 조세제도이다.\n\n지정은제 시행 전, 청나라는 지세와 정세 모두를 징수하는 조세제도인 일조편법을 따랐다. 하지만 호구조사의 부정확과 탈세를 위한 인구수 은닉이 행해지며 정세 부과는 날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1713년(강희 52년), 강희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711년의 정수(丁數)를 기준으로 하고 그 이후의 조사로 증가한 인구 에 대해서는 정세를 부과하지 않기로 했다.\n\n이 정책으로 전국의 정세 수취량은 고정되었으나 정세를 징수당하는 농민들이 도망하는 일이 발생하여 정세 수취량은 다시 줄기 시작하였다. 강희제는 이러한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 위해 지세 1냥당 약간의 정세를 부과하는 식의 탄정입묘(攤丁入畝) 방법을 고안하였고 이로 인해 정세가 지세로 합쳐지게 되었다. 이 방식은 광둥성에서 최초로 시행되었으며 옹정제 때에 이르러 전국으로 확대되었다.\n\n지정은제 하에서는 세금을 은으로 냈기 때문에 세금을 내기 위한 은 수요가 증대하였고 이는 서양 국가와의 대외 무역에 영향을 미쳐 중국의 특산물(비단, 도자기 등)과 은을 교환하는 무역 형태를 정착시켰다. 1800년~1839년까지 중국에 밀수된 아편으로 인하여 유출된 은의 양은 대략 6억 냥 정도로 추정한다. 이 같은 은의 유출은 지정은제를 위협했다. 즉 은과 동전의 교환 비율이 1:800에서 1:1,500~2,100까지 급변했다. 결국 민생을 도탄에 빠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었다. (↔제1차 아편 전쟁) 또한 그동안 은닉하고 있던 인구가 새로이 호적부에 추가되면서 인구가 급증하는 경향을 보였다.", "재정 정책 역시 기존에 비해 수정하여, 세금을 적게 하였어도 무역 등으로 이미 은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국고도 그다지 별문제가 없었다. 1668년(강희 7년)에 1,500만 냥, 1710년(강희 49년)에 5천만 냥이 넘는 은자가 있었으나, 강희제의 말년인 1722년(강희 61년)에는 은자가 7백만 냥도 채 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국고의 거의 모든 은자가 군비로 들어갔으며, 강희제 역시 정무를 보기에는 이미 너무 늙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강희제는 이것을 타개하기 위해, 재정에 재능을 가진 4남 옹친왕 윤진(胤禛)에게 조언을 하고 새로운 정책을 찾으라 명하였으나, 강희제는 그 정책의 실현을 보지 못했다.", "묘법연화경은 줄여서 ‘법화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우리나라 천태종의 근본경전으로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음을 기본사상으로 하고 있다. 화엄경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사상의 확립에 크게 영향을 미쳤으며, 삼국시대이래 가장 많이 유통된 불교경전이다.\n\n이 책은 후진의 구마라습이 번역한『법화경』 7권을, 고려 우왕 3년(1377)에 하덕란이 죽은 어머니의 명복과 아버지의 장수를 빌기 위해 정성들여 옮겨 쓴 것이다. 하얀 닥종이에 먹으로 썼으며, 각 권은 병풍처럼 펼쳐서 볼 수 있는 형태로 되어 있다. 접었을 때의 크기는 세로 31.8 cm, 가로 10.9cm이다.\n\n각 권의 표지에는 금·은색의 화려한 꽃무늬가 장식되었고, 금색으로 제목이 쓰여져 있다. 또한 각 권의 첫머리에는 책의 내용을 요약하여 묘사한 변상도(變相圖)가 금색으로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책 끝부분에 있는 일본인이 쓴 기록을 통해, 세종 25년(1443)에 일본으로 유출되었으며, 선조 38년(1605)에는 광대원(廣大院)에 소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n\n이 책은 책을 쓰게 된 경위를 적은 글과 변상도를 모두 갖추고 있고, 보존상태도 양호할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되찾아온 문화유산이라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강희제는 선교사들을 황실 천문대 등의 요직에 두는 한편 초기에는 청나라에서 가톨릭교회의 포교를 허가하였다. 1692년(강희 31년)에 청나라의 어느 곳에서도 선교를 허락하고 조정의 가톨릭교회에 대한 박해를 엄금한다는 칙령을 내렸다. 몽골 원정 때 말라리아에 걸렸다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강희제는 선교사들에게 더 많은 호의를 가지게 되었고, 북경 내성에 성당을 짓는 것을 허락하여 선교사들과 가톨릭교회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였다. 그러나 그 뒤로 당시 선교지역의 전통을 존중하는 예수회를 제외한 근본주의 성향 가톨릭 선교사들이 중국의 조상 제사를 우상숭배라 비판하였고, 곧 이들 선교사들의 말을 들은 로마 교황청에서 중국의 전례(典禮)를 문제로 삼음으로서 중국의 전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n\n1704년(강희 43년)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하느님을 상제(上帝)나 천주(天主)로 표기하는 것이 서양에서 뜻하는 조물주라는 말과 그 뜻이 서로 다르고, 매년 봄과 가을마다 지내는 공자의 제사와 조상의 제사가 우상 숭배이므로 중국의 전례를 금지한다는 회칙을 발표하고 1715년(강희 54년) 이를 재확인하였다. 강희제는 이에 대해 매우 불쾌하게 여겨 교황의 회칙을 가지고 온 특사인 교황청 소속 추기경을 체포하거나 본국으로 강제 송환하였다. 1706년(강희 45년) 강희제는 중국의 전통을 존중하는 예수회 에 찬동하지 않는 선교사들을 모두 국외로 추방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특단의 상응 조치로 1721년(강희 60년) 교황의 회칙 수렴을 거부하고, 교황청이 더 많은 선교사들을 파견하고 백성들에게 선교·선동해서 청나라를 가톨릭 국가로 만들려 한다며 교황의 회칙을 비판하였고, 선교사들의 청나라 출입을 허가하는 대신 선교는 불법화하였다. 강희제가 붕어하고 난 다음에 1724년(옹정 2년), 강희제의 아들인 옹정제는 포교와 선교사들의 청나라 출입을 모두 불법화하고 예수회 선교사들 역시 당시 포르투갈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오문(澳門, 마카오)으로 추방하였다.", "강희제는 세수입을 전시(戰時)에도 늘리지 않아 민생이 전시에도 평상시를 유지하도록 하였고, 치세가 지속할 때마다 세금을 올리기는커녕 점점 감면하여 백성의 존경과 칭송을 한몸에 받았다. 1711년(강희 50년)에는 성세자생인정(盛世滋生人丁) 제도를 공포하여 성인의 인두세를 당시의 값에서 영원히 동결시키고 그 값을 받는 장정의 수 또한 2,450만 명으로 한정하고 그 이상은 받지 않겠다고 천명하였다. 또한, 이 제도가 시행된 지 얼마 안 가 지정은제를 북경과 하북성 일대에서 시행하기도 하였다. 대만 수복 이후에는 4개의 항구를 열어 대외 무역업을 활성화하여 많은 은자를 국고에 가져오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강희제의 선정은 청나라와 만주족에 대한 한족 백성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으며, 한족을 융화하기 위한 강희제의 피나는 노력에 자연히 한족 백성은 스스로 청나라를 따르게 되었다. 또한 몽골의 소수 민족과의 관계에도 힘을 기울여 1703년(강희 42년) 성경과 가까운 곳인 승덕 지방에 피서산장이라는 큰 이궁을 지었고 그 곳에서 각기 다른 소수 민족의 족장 등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거나 부족의 의식도 행하게 허락하였다.", "강희제는 8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아직 친정은 할 수 없었다. 본래 어린 황제가 즉위하였으면 황태후나 태황태후가 수렴청정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이미 황태후였던 자화황태후(慈和皇太后), 즉 강희제의 생모인 효강장황후 동가씨는 강희제가 등극한 지 얼마 안 되어 병에 걸리고 2년 만인 1663년(강희 2년)에 24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다른 황태후이며 강희제의 적모인 인헌황태후(仁憲皇太后), 즉 순치제의 황후인 효혜장황후는 황태후 서열로는 효강장황후보다 위였으나 엄연히 위에 시어머니인 효장태황태후가 있어서 수렴청정할 권한은 쥘 수 없었다. 대신들 사이에서 수렴청정할 것이라 예상하던 효장태황태후는 수렴청정을 직접 하는 대신 네 명의 보정대신들에게 정책 최고 의결권을 내렸다 그리하여 보정대신들이 그를 보필하였다.\n\n보정대신들은 어린 황제가 훗날 환관들에게 농락될까 봐 순치제 때 설치된 명나라의 동창(東廠, 환관의 수뇌부이며 황제 직속 정보기관)과 비슷한 기구인 십삼아문(十三衙門)을 폐지하여 환관들을 정무에서 축출하고 원래 순치제 때 폐지된 내무부를 다시 설치하여 황제에게 충성스러운 만주족 충복들로 하여금 환관들을 대신하게 하였다. 보정대신은 모두 꽤 상당한 권력을 누렸으나, 그중에서도 병부상서 오배가 제일 권력이 막강하였다. 오배는 백성들의 땅을 불법으로 획책하는 등 갖은 전횡을 일삼았다. 하지만 병권을 틀어쥐고 있어서 오배에 비해 세력이 미약한 대신들이나 아직 친정을 시작하지 못한 강희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일단 강희제는 오배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일부러 장정들을 불러 몽골 씨름을 하도록 하였다. 또한, 틈틈이 제왕학 수업을 잊지 않고 배웠다. 강희제의 그 스승이 바로 명나라의 마지막 진사시(進士試)에서 장원을 한 제세(濟世)였다.\n\n 강희제는 오배를 견제하기 위해 또 다른 보정대신인 색니의 손녀를 황후로 맞아들이기도 하였다. 그녀가 바로 강희제의 정궁황후이며 첫 번째 황후인 효성인황후(孝誠仁皇后) 혁사리씨다. 1667년(강희 6년) 7월 14살이 된 강희제는 조상의 예법에 따라 친정을 시작하였고 성인 의례와 함께 정식 즉위식을 치렀으나, 그 해에 자신을 보호해준 색니가 소극살합에게 강희제를 돌봐 달라는 말을 남기고 죽는다. 소극살합이 권력을 잡으려 하였으나 이에 위기감을 느낀 오배는 소극살합에게 날조된 역모죄를 뒤집어씌워 교수시키고 자신이 조정의 전권을 장악하였다. 오배는 소극살합을 죽이는 과정에서 이에 반대하는 강희제를 강압하여 결국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강희제는 아직 오배의 세력에 대응할 수 없어 굴복하고 말았다. 오배의 이러한 행동은 분명 군주 기만죄(기군죄)였으나 아직 힘이 약한 강희제는 그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 다른 보정대신인 알필륭은 오배의 편에 붙었으나 오배의 전횡을 부추기지도 그렇다고 비난하지도 않았다. \n\n선황 순치제의 유조를 받은 고명대신 중 한 명인 소극살합을 죽이고도 계속 더 많은 횡포를 일삼는 오배를 보고 강희제는 군사를 이끌고 선수를 치려 했다. 그러나 조모인 효장태황태후가 이를 말리고 사태를 지켜보라 일렀다 하루는 소극살합을 죽인 오배가 병을 핑계로 두문불출하는데 강희제가 문병을 갔다. 오배는 강희제에게 위문을 받은 뒤 다시 자리에 누우려 할 때, 그의 품 속에서 단도가 발견되었다. 강희제는 만주족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단도를 찬 것은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전통이라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으나, 분명 오배가 선수를 틈타 자신을 죽이려 한 것을 안 강희제는 치밀하게 오배를 제거하기 위한 작전을 본격적으로 세웠다. \n\n강희제는 색니의 아들 색액도(索額圖) 등을 규합하여 무술 수련을 한다는 명목으로 선복영이라는 이름의 친위병을 양성하였다. 1669년(강희 8년) 5월 16일 오배가 궁정에 알현하려 오자 강희제는 기회를 틈타 선복영을 앞세워 오배를 체포하였다. 강희제는 오배가 군주기만죄인 기군죄 등 30개의 대죄로 30번 처형되어야 마땅하지만 선황인 태종과 세조를 전투에서 온몸으로 막은 공을 참작하여 가산을 적몰하고 목숨만 보전하게 하고 유배형을 내렸다 그러나 언제 다시 반기를 들지 모른다는 여러 대신들의 주장으로 귀양을 보내기도 전에 결국 사약을 받아 처형되었다. 강희제는 오배의 죽음으로 뒤숭숭한 조정에 색니의 차남 색액도를 대신으로 삼아 조정을 안정시켰다. 이로써 강희제는 진정한 친정을 하게 되었으며, 신하들에게 막중한 권한을 맡기지 않고 강력한 황권을 확립하기에 이른다.", "南九萬(1629-1711)은 숙종 초 대사성, 형조판서를 거치고 1683년 노소론이 나뉠 때 소론의 영수가 된 인물이다. 화면의 우상단에 ‘領議政致仕藥泉南先生眞 文人領議政崔錫鼎贊’이라고 쓰여 있고 화면 좌상단에는 大司成 崔昌大가 쓴 긴 찬문이 쓰여 있다. 최창대가 대사성으로 있었던 것은 1711년뿐이었고 이후에는 더 높은 관직을 역임하였으므로 대사성이란 관직명으로 인하여 이 초상이 1711년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n\n초상은 관복을 입고 교의에 앉은 전신교의좌상으로 얼굴이 정면상으로 묘사되었다는 점이 이채롭다. 오사모에 녹포단령을 착용하고 쌍학문 흉배와 서대를 하고 있다. 이 초상 가운데 가장 특이한 요소는 얼굴표현에서 나타난다. 정면으로 그려진 얼굴은 윤곽선이 거의 없는 듯이 보여 몰골기법에 가깝게 보이며, 얼굴 전체적으로 미묘한 선염을 구사하며 높낮이를 드러내는 수법을 사용하였다. 정면상이란 점에서도 새로우며 얼굴의 입체감을 드러내기 위하여 선묘의 효과를 극소화하고 선염처리를 활용한 점도 이채롭다. 이 초상은 18세기 초 새로운 영정 유형과 기법의 대두라는 점에서 중요한 사례가 된다", "강희제는 유교 사상으로 국가를 통치하려 했다. 아버지 순치제와 아들 옹정제가 만주족이 믿던 불교, 즉 라마교를 중요시하였다면 강희제는 오히려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더욱 중시, 즉 숭유억불을 국시로 삼았는데 그 방식은 청나라 이전에 중국을 다스린 한족 출신의 황제와 그 통치 이념이 비슷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도 불교를 믿어 불교를 그리 심하게 탄압하지는 않았다. 강희제는 군주가 모범을 보여야 백성이 군주를 믿고 따를 것이라 하여 백성을 위해 헌신하는 이른바 ‘섬기는 리더십’을 자신의 통치 철학으로 삼았다. 삼국 시대 때 촉한의 승상 제갈량의 후출사표의 한 구절인 ‘국궁진력’(鞠窮盡力), 즉 ‘모든 것을 쏟아 붇는다’와 국궁진력한 후 ‘안거낙업’(安居樂業), 즉 ‘백성을 편안하게 살게 해주고 즐겁게 일에 종사하게 해준다’를 자신의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은 것이 좋은 본보기이다. 유교적 사상을 중시한 강희제는 백성들에게 언제나 효를 중시하여 백성에게 유교 지침서를 내렸고 아버지 순치제와 어머니 효강장황후가 떠난 후 자신의 양육을 책임진 조모 효장태황태후를 모시는 데에도 부족함이 없이 효도를 다하려 노력하였다. 효장태황태후는 1688년(강희 27년)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희제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손자인 강희제와 증손자들인 황자들에게 큰 존중을 받았다. 또한 강희제는 인(仁), 덕(德), 예(禮) 중심의 인자한 정치를 펼치고 되도록 과격한 정치를 펴지 않으려 주력하였다. 강희제는 본래 명나라 홍무제가 만들고 순치제가 바꾼 〈육유(六諭)〉를 확대한 〈성유십육조(聖諭十六條)〉를 1667년(강희 6년)에 반포한 뒤 백성들에게 이 내용을 토론하고 실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강희제의 뒤를 이은 넷째 아들 옹정제는 성유십육조의 매 조마다 친히 설명을 붙이고 그 의의를 보다 알기 쉽게 해설한 〈성유광훈(聖諭廣訓)〉을 편찬하여 전국에 반포하여, 유교통치이념을 더욱 굳건히 하였다.", "1677년(강희 16년) 강희제는 중국 전통의 고유 내각인 상서방(尙書房)을 개편하여 남서방을 설치하여 자신의 경연장으로 사용하였으며 전 황조인 명나라처럼 여러 명의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를 두어서 조정의 일을 의논하였다. 이 내각대학사의 남서방은 훗날 강희제의 아들인 옹정제 때에 군기처로 발전하게 된다. 황궁의 살림을 아끼려고 명나라 때에 10만 명이나 되던 환관과 궁녀의 수를 400명으로 대폭 줄였으며, 비용 역시 명나라 시절에 비해 40분의 1로 줄였다. 강희제 스스로 옷이 완전히 낡지 않은 이상 그 옷을 기워서라도 입을만큼 크게 검소하였고 자신의 침전에도 10명 안팎의 환관과 궁녀밖에 두지 않았다. 치수 공사에도 뜻이 있어 1677년(강희 16년)에 황하 치수 공사에 착수, 근보(靳輔)를 그 책임자에 명하였으며 1684년(강희 23년)에 완성해 황하가 범람하지 않도록 하여 농민의 피해를 줄였다. 또한, 대운하 역시 보수·증축하여 많은 배가 물량을 대량 수송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로써 황하가 안정되어 많은 물자가 장강과 황하를 잇는 대운하를 타고 범람 걱정 없이 북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들은 10m가 넘는 깊이의 구덩이를 팠고, 점토로 틀을 만든 후 단단히 다진 흙으로 보강하여, 뜨거운 금속이 밖으로 흘러나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종의 크기가 워낙 거대하였기 때문에, 종을 만들 재료를 구하는 것부터 상당히 어려웠다. 이를 위해 옛 종의 잔해를 다시 녹였고, 525kg의 은과 72kg의 황금이 이 종을 만들기 위해 추가적으로 쓰여졌다. 몇 달의 준비기간 후, 1734년 11월에 제작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고, 결국 이 작업은 이반 모토린이 죽을 때까지 끝나지 못했다. 이반 모토린이 죽은 이후, 종의 제작은 그의 아들 미하일이 맡게 되었다. 1735년에 두 번째 시도가 성공하여, 1737년까지 종의 냉각과 함께 장식이 추가되었다.\n\n하지만 종이 완성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737년 5월, 모스크바 크렘린에 대화재가 발생하였고, 불길은 종이 보관되어 있던 건물까지 번졌다. 당시 종의 관리자들은 종이 녹을 것을 두려워해 종에 차가운 물을 부었으나, 이는 오히려 역효과를 초래해 11개의 금이 발생하였고 10,000kg이 넘는 조각이 갈라져 나왔다. 화재는 이후에도 계속 번졌고, 결국 종이 다시 제작용 구덩이로 굴러 떨어져 버렸다. 1712년과 1819년에 이를 다시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차르의 종은 거의 100년 동안이나 구덩이 속에 있어야 했다. 나폴레옹이 1812년에 모스크바를 점령한 후 이 종을 전리품으로 가져가려 했으나, 그 크기와 무게 때문에 좌절했을 정도였다. \n\n마침내 1836년 여름에 프랑스 건축가가 이 종을 들어올려 석조 받침대 위에 올리는 데 성공했다. 부서진 부분만으로도 당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컸던 종보다 3배가 컸으며, 부서진 부분에 출입문을 만들어, 한동안 성당으로 쓰이기도 할 정도였다.", "훌륭한 정치를 펼친 강희제였지만, 그의 자식들은 그다지 큰 그릇이 되지 못했다. 강희제는 황자들 모두를 자신의 경연 토론장인 남서방에서 교육시켜 유학의 사상이 몸에 밴 황자로 만들려 하였으나 대부분 그리 되지 못하였다. 제2황자이며 강희제의 유일한 적자이자 적장남인 윤잉(胤礽)은 첫 번째 황후인 효성인황후의 소생으로, 효성인황후가 1674년(강희 13년)에 윤잉을 낳은 직후 난산으로 붕어하자 이를 슬퍼한 강희제가 이듬해인 1675년(강희 14년)에 바로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 이것은 본래 가장 유능한 아들을 후계자로 삼는 만주족의 전통을 깨고 한족의 전통을 도입하는 것이었기에 만주족 대신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었으나, 유학을 숭상한 강희제는 이런 논의를 단호히 일축하였다. 이에 서장자이고 제1황자의 작위를 받았으며 윤잉보다 두 살이 많은 윤시(胤禔)가 대신들 사이에서 윤잉의 경쟁 상대로 떠올랐으나 강희제는 여러 번 공식석상에서 윤잉을 후계자로 천명하여, 제위는 윤잉이 승계받는 것으로 확정되어 갔다.\n\n강희제는 윤잉의 거처를 과거 명나라 때 황태자들이 머물던 동궁인 종수궁(鍾粹宮)으로 선택하지 않고 역대 황제와 가문의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인 봉선전 옆에 새로 궁을 지어 육경궁(毓慶宮)이라 이름짓고 이곳을 윤잉의 거처로 정하였다. 또한 강희제는 다른 어느 황자들보다 그 위상을 높였으며, 그리고 황제에게만 입히는 황포를 윤잉에게 특별히 입을 수 있도록 허락하고, 황궁 어디서든 가마나 말을 탈 수 있게하였다. 또한 당시 어느 친왕들보다 더 많은 봉토와 식읍을 받는 등 큰 특전을 베풀어 주었다. 당시 윤잉이 받았던 봉토와 식읍은 역대 청나라 친왕 중 가장 많은 봉토를 받은 도르곤보다도 더 많이 받았다. 강희제는 윤잉이 훗날 황자들에게 핍박받을지도 모를까봐 윤잉을 제외한 나머지 자식들의 작위를 올려주는 것을 꺼려하였고 실제로 1700년대까지 윤잉을 제외한 황자들은 모두 친왕에 오르지 못하였다. 마지막으로 강희제는 윤잉에게 다른 황자들이 받는 교육보다 더 수준높고 엄격한 교육을 시켰다. 윤잉을 가르치는 사부 역시 당대 최고의 학자 중 한 명인 왕섬을 임명하여 윤잉을 완벽한 차기 황제로 만들려 하였다. 머리가 총명하던 윤잉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공부하여 이미 4살 때 한문을 쓰기 시작하여 7살에는 사서오경을 다 떼었다 한다. 그리고 강희제의 순행과 몽골 원정 때에도 황태자로서 조정을 장관, 대소사를 처리하여 정치 분야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백성들에겐 따뜻하던 강희제는 자식, 특히 자신이 가장 총애하고 아끼던 자식인 윤잉에겐 더없이 냉정하고 혹독하게 대하였다\n\n윤잉은 20대까지만 해도 아버지의 뜻을 받들고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였으나 30대가 넘어서부터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주색잡기를 좋아하였다 속으로는 윤잉을 매우 아꼈으나 겉으로 내색을 하지 못한 아버지의 냉정함과 혹독함, 어머니를 태어나자마자 여읜 모정의 갈망, 그리고 형제들간의 암투 등으로 인해 점점 타락하기 시작한 윤잉에게 실망한 강희제는 3황자 윤지, 4황자 윤진, 8황자 윤사 등 다른 황자들에게 각기 부서를 책임지고 도맡게 하였다. 다른 황자들은 모두 육부를 관리하여 강희제의 신임을 얻고 군왕, 친왕으로 승승장구하였으나, 윤잉은 어떠한 부서도 맡지 않은 채, 부황의 눈밖에 나고 정신질환에 가까운 비행까지 일삼았다 한다. 그리고 이미 조정은 황자들과 신료들의 야심으로 인해 사분오열이 되었는데, 이 중 윤시는 자신이 장자인데 언제나 차남이며 황태자인 윤잉의 뒤에 서야 되고 윤잉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절을 해야 했으며 자신이 아우들에게 “형님”이라 불리는 반면 윤잉은 이복 형인 윤시를 비롯한 형제들에게 “황태자 전하”라는 존칭으로 불리는 것이 큰 불만이라 반윤잉 세력에 적극 가담하였다. 윤잉이 황태자로 있을 당시 윤잉을 포함한 9명의 황자가 파벌에 참여하였는데 그 계보와 파벌에 참가한 주요 대신들을 보면 이러하다.\n* 황태자당(皇太子黨)\n** 차남 황태자 윤잉(皇太子 胤礽)\n** 영시위내대신 색액도(領侍衛內大臣 索額圖)\n* 황장자당(皇長子黨)\n** 장남 직군왕 윤시(直郡王 胤禔)\n** 영시위내대신 납란명주(領侍衛內大臣 納蘭明珠)\n* 황사자당(皇四子黨)\n** 4남 옹군왕 윤진(雍郡王 胤禛)\n** 13남 윤상(貝子 胤祥)\n** 사천순무 연갱요(四川巡撫 年羹堯)\n* 황팔자당(皇八子黨)\n** 8남 패륵 윤사(貝勒 胤禩)\n** 9남 패자 윤당(貝子 胤禟)\n** 10남 돈군왕 윤아(貝子 胤䄉)\n** 14남 패자 윤제(貝子 胤禵)\n** 영시위내대신 동국유(領侍衛內大臣 佟國維)\n** 보군통령 융과다(步軍統領 隆果多)\n* 중립파 \n** 3남 성군왕 윤지(誠郡王 胤祉)\n** 5남 항군왕 윤기(恆郡王 胤祺)\n** 7남 순군왕 윤우(淳郡王 胤祐)\n** 12남 패자 윤도(貝子 胤祹)\n 그중 이미 황태자 윤잉의 위치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알아챈 윤잉의 작은외조부이자 이미 40여 년 전에 죽은 색니의 차남, 색액도(索額圖)는 자신을 위시로 한 태자당(太子黨)의 결성과 황장자인 직군왕 윤시와 그 외숙부 납란명주(納蘭明珠)를 위시로 한 황장자당의 결성으로 붕당이 시작되어 서로 조정의 주도권과 황위 후계권을 잡으려 하였고, 심지어는 태자당이 윤잉에게 알리지 않고 강희제를 암살하려 하자 진노한 강희제는 1703년(강희 42년)에 색액도를 사사하고 그 일파를 척결해 처형하거나 유배보낸 뒤 윤잉에게 엄중한 경고를 내렸으나, 여전히 윤잉은 달라지지 않고 나태하였으며 조회에도 참석치 않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1708년(강희 47년)에 강희제는 윤잉을 폐위시키고 서인으로 삼아 종인부(宗人府)에 가두어 버렸다. 윤잉을 폐위하고 태묘(太廟)에 고할 때, 강희제는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그 후 6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우울하게 지내다가 중풍에까지 들었다고 실록은 기록하였다. 그러나 본래 윤잉을 총애하였고 황태자를 자리에 두고 골육상쟁을 염려한 강희제는 이듬해인 1709년(강희 48년)에 윤잉이 직접적으로 대역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황태자로 복위시키고 도리어 납란명주를 하옥시켰다. 색액도와 납란명주는 40년 동안 강희제의 곁에서 정치를 도와주던 조정의 수반들이자 영시위내대신이었으나 황위를 놓고 당쟁이 시작되자 강희제는 이들을 단호히 조정에서 혁파하여 당쟁의 불씨를 끄려 하였다. 하지만 윤잉이 복위되자 안심하였던 황장자당을 중심으로 황팔자당까지 합세한 반황태자파는 다시 윤잉을 폐위시킬 음모와 이간책을 꾸몄다. 황팔자당은 8황자 윤사가 주축이 되었고 이에 가담한 대신으로는 또다른 조정의 영수이며 강희제의 외삼촌이자 세 번째 장인인 동국유와 그 아들인 융과다가 윤사를 도왔다.\n\n 그럼에도 윤잉이 반성을 하지 않고 다시 주색잡기를 좋아하였으나, 문제는 윤잉이 강희제의 후궁인 서비 정씨를 건드려 황실에 충격을 던져주었다. 1712년(강희 51년)에 강희제는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장강 이남으로 순행을 떠났는데 아직도 윤잉을 못미더워한 강희제가 윤잉이 북경에서 딴 마음을 품지 않나 관찰하기 위해 일부러 북경을 비운 것이다. 그리고 황제가 궁을 비웠으니 황태자였던 윤잉이 임시로 정무를 돌보았다. 그러나 윤잉은 음모를 꾸며 강희제가 북경으로 환도하면 강희제에게 태상황으로 물러나고 자신이 찬위하겠다는 쿠데타를 기도하였는데, 이 사건은 확실히 윤잉이 주도한 역모였다. 이것을 눈치챈 북경의 대신들은 순행 중인 강희제에게 돌아올 것을 요청하였고 강희제는 북경으로 돌아오자마자 윤잉을 바로 황태자에서 폐위시켜 냉궁인 함안궁에 가두고 폐서인하여 영원히 서인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또한 두 번이나 폐태자시킨 이 사건을 다시 언급하는 자가 있으면 참수할 것이라 엄중히 명하였다. 이 사건의 폐단을 계기로 청나라는 멸망할 때까지 죽은 황자를 황태자로 추서만 하였을 뿐, 생전에 어느 황자도 황태자로 지명받지 못했다. 강희제는 얼마 뒤 전위조서를 건청궁 ‘정대광명’(正大光明) 편액 뒤에 보관토록 하고 자신이 붕어한 뒤에 열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저위비건법(儲位秘建法)이다. \n\n이로 인해 형제들 간의 후계자 다툼이 발생하였다. 그중 4남 옹친왕 윤진, 8남 염친왕 윤사(胤禩), 14남 순군왕 윤제(胤禵)가 가장 실력있는 아들들이었다. 장자인 직군왕 윤시는 과거 윤잉이 처음 폐위되었을 때 폐태자 윤잉을 저주하고 몰래 자객을 보냈으며, 윤잉의 방에다 칼이 꽂힌 윤잉의 인형을 숨겨놓기도 하였다. 심지어 윤시는 부황 강희제 앞에서 윤잉을 죽이겠다 하였으나, 오히려 크게 혼나고 윤잉처럼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당시 8남 윤사가 인정이 많고 공명정대하여 가장 많은 신료의 신망을 받았으나 실제로 윤사는 간교하였고 이간질에 뛰어나 황자들간의 분란을 부추겼다. 심지어 윤사는 심복을 시켜 점쟁이를 매수하여 자신이 다음 황제가 될 것이란 소문을 공공연히 내어 강희제의 분노를 사서 강희제 말기에 윤사는 조정에서 중책을 맡지 못하였다. 이들은 서로 공적을 다투고 부황인 강희제의 총애를 받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특히 강희제는 만년에 14남인 윤제를 총애하여 그에게 북방의 만리장성을 수호하는 중책인 무원대장군(撫遠大將軍)의 작위와 병부의 지휘권을 내렸다. 병권을 내려주면 황위를 물려주는 것으로 생각하던 황자들간의 암투는 더욱 격화되었고, 8남 윤사와 14남 윤제가 손을 잡고 파벌을 형성하자 4남 윤진 역시 파벌을 형성하여 조정의 주도권을 잡으려 하였다.", "또한 강희제는 당나라·송나라 때의 과거의 일부분이었던 전시(殿試)를 발전시킨 박학홍유과(博學鴻儒科)를 실시하여, 많은 인재, 특히 강남의 한족 출신 학자들을 모아 박학홍유로 삼았고 이 중에서 뛰어난 이들은 한림원 학사로 삼았다. 그리고 이 인재들로 하여금 명나라 시기의 실록인 《명사》(明史)를 편찬하여 초기의 명 태조와 명 성조 때 나라가 번창하였다는 점과 후에 여러 황제의 실정을 부각시켜서 청나라가 명나라의 정통성을 확실히 계승하였다는 것을 알리려 하였다. 또한, 박학홍유로 하여금 백과사전인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연감유함》(淵監類函), 《패문운부》(佩文韻府), 《역상고성》, 《수리정온》, 《전당시》 등을 편찬케 하였다. 여기서 가장 돋보이는 문화적 업적은 바로 1711년(강희 50년)에 시작하여 5년 뒤인 1716년(강희 55년)에 완성된 《강희자전》(康熙字典)인데, 이것은 박학홍유 수십 명과 대신 진정경(陳廷敬) 등이 수년 동안 공을 들여 만들었다. 4만 2천여 개의 한자가 수록된 《강희자전》의 출판은 현대 중국어의 어법과 단어를 확립시킨, 강희 시대 문화 사업의 완성이었다.", "플레이톡(PlayTalk, 줄여서 플톡)은 엠엔씨소프트가 2007년 3월부터 2010년 9월까지 운영했던 마이크로 블로그 서비스이다. 이외수, 정동영 등의 유명인들이 사용하면서 인기를 끌었다.\n\n사용자가 플레이톡에 글을 작성하여 게시하는 방식은 자신의 공간인 '나의 플레이톡'의 Message란에 글을 쓰고 일상, 생각, 고민, 연애, 질문, 쇼핑, 음악, 영화, 문화/공연, TV/연애, 음악, 독서, 애니, 게임, 스포츠, 구인등의 정해진 분류들 중에서 하나를 고른 후, 글을 쓰고 저장하기 버튼을 누르는 것이다. 2007년 3월 23일부터는 모바일 서비스를 개시해 휴대전화의 문자 메시지 기능을 이용하여 플레이톡에 글을 쓸 수도 있다. (이러한 행위를 반복적으로 하는 것을 이용자들은 플톡질이라고 부른다) '라운지'에서는 이런 방법으로 쓰인 이용자들의 글들이 올라오며 F5 버튼을 눌러 글 갱신을 하여 누군가가 달아 놓은 답글을 볼 수 있다. 단, 한 사람이 연속으로 글을 쓰더라도 라운지에는 오직 최근에 쓴 단 하나의 글만 올라오게 된다.\n\n라운지 등을 통해 자신의 플레이톡에 다녀간 사용자들의 목록은 '다녀간 사람들' 메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내가 다른 사람(혹은 자기 자신)의 플레이톡에 쓴 댓글은 '대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화기록에는 편지 아이콘이 있는데, 아이콘이 닫혀있는 경우 아직 글쓴이의 확인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답글한 이가 알 수 있도록 최근에 업그레이드 되었다.\n\n또한 자신의 글에 댓글을 단 사용자 명 옆에 '로그'라는 메뉴가 있으며 메뉴를 누르면 그동안 그 사람과 내가 나눈 대화를 확인할 수 있으며 답글에 '공감'이라는 링크를 눌러 공감투표를 할 수 있다.\n\n친구로 초대해서 초대한 친구가 수락을 하게 되면 '친구들의 목록'에 추가가 되며, 친구의 글과 그 글에 달린 답글을 읽을 수 있다. 참고로, 가입시 기본적으로 개설되었다는 메시지가 쓰여지며 친구목록에 운영자인 'HAN'이 자동 추가된다.\n\n플레이톡 내에서는 사용자들끼리 주로 사용하는 시간대에 따라 새벽반, 아침반, 오전반, 오후반, 저녁반이라는 은어가 사용되고 있으며, 특히 거의 모든시간에 라운지에 출몰하는 사용자는 따로 '종일반'이라고 불린다.\n\n한국어뿐만 아니라 영어, 일본어, 중국어도 지원하며, 태터툴즈 (티스토리 포함), 워드프레스 사용자는 플러그인을 이용해 자신이 플레이톡에 쓴 글 목록을 사이드바 등에 표시할 수 있다.\n\n2010년 9월 8일, 유사 서비스인 미투데이와의 경쟁에서도 밀린 것은 물론,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강력한 해외 서비스의 상륙에 따른 수익성의 악화로 서비스로 중단했다.", "비를 세운 1536년은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90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글씨는 한글창제 당시와 똑같은 글씨에 서민적인 문체로 쓰여져 있다. 남아있는 ‘한글비’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아직 한글이 널리 사용되지 못했던 시기에 과감히 ‘한글묘비’를 세웠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더욱 돋보이며 국어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n\n이 ‘한글영비’는 국어생활사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첫째, 중종 31년(1536) 당시 한글이 얼마나 널리 알려져 있는가를 증명해주는 자료이다. 둘째, ‘한글영비’에 새겨진 한글의 서체는 훈민정음이 창제된 직후의 서체, 즉 <훈민정음 해례본>의 서체와 <용비어천가> 서체의 중간형의 성격을 지닌다. 셋째, 이 비석의 글은 비석의 이름인 ‘영비(靈碑)’를 제외하고는 국한 혼용이 아닌 순 국문으로 쓰여 있다. 본격적으로 한글로만 쓴 문헌은 18세기에나 등장하나 이 ‘한글영비’는 16세기에 이미 순국문으로만 쓰인 문장이라 할 수 있다. 넷째, ‘한글영비’는 언해문이 아닌 원 국문 문장이다. 15세기 이후 한문 원문을 번역한 언해문이 한글자료의 주종을 이루었으나 이 ‘한글영비’는 짧은 문장이긴 하나 처음부터 우리말로 쓰인 문장으로, 한글이 한문 번역도구가 아닌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직접 전달하는 도구로 변화하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다섯째, ‘한글영비’에 쓰인 국어 현상은 이 당시의 언어를 잘 반영하여 당시 국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현재는 대만 문제와 맞물려서 ‘하나의 중국’ 정책을 내세우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강희제의 대만 수복과 몽골 정복 등 그의 민족 융합 업적과 백성을 중히 여기는 이른바 ‘섬기는 리더십’을 높이 사 크게 추켜세운다.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인 장쩌민과 후진타오, 국무원 총리를 지낸 주룽지 역시 중국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강희제에게서 본받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과거 한족들이 오랑캐라 멸시하던 만주족 출신이고 그들의 지도자였던 강희제를 지금은 한족 중심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정치 스타일과 대만 수복 등에서 크게 추켜세우는 인물로 둔갑되었다며 이러한 열렬한 강희제 숭배 운동을 비판하였다.\n\n이러한 중국의 적극적인 강희제 홍보는 문화·예술 방면에서도 나타난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작가 얼웨허(이월하, 二月河)가 쓴 소설 《강희대제》는 중화인민공화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후속작들인 소설 《옹정황제》·《건륭황제》 등도 독자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구가하였다. 2001년에 중국중앙방송에서 소설 《강희대제》를 원작으로 한 《강희왕조》(康熙王朝)가 방송되어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사극 드라마 중 하나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강희제 역을 맡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견 배우인 천다오밍(진도명, 陳道明)은 어린 나이에 즉위한 강희제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그의 리더십, 자식들로 인하여 골치를 앓는 모습 등을 잘 보여주었다. 이로 젊은이들에게 강희제의 모습과 그의 이름을 더욱 많이 각인시켜, 중국의 국민 배우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강희왕조》를 시작으로 강희제를 다룬 많은 작품들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에서 방송되었고, 이 작품들의 인기 역시 높았다. 《강희왕조》 전에 방송하였으나 강희제의 다음 세대인 옹정 시대를 시대적 배경을 다룬 드라마 《옹정왕조》(雍正王朝)에서도 강희제는 현명하지만 《강희왕조》 때보다 자식들의 일로 피곤한 삶을 산 황제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그러나 홍콩 무협 드라마 《군림천하》(君臨天下)에서는 차남인 윤잉과 14남 윤제만을 편애하다가 이것이 한번도 부정을 받지 못하고 자란 4남 윤진에게 자극제가 되어 결국 윤진에게 염주로 목졸려 살해당하는 비운의 군주로 나온다.\n\n무협소설가 김용(金庸) 역시 청년의 강희제가 오배, 오삼계, 정경 등과 마찰을 빚을 때를 배경으로 한 무협소설 《녹정기》(鹿鼎記)를 썼는데, 여기에서 강희제는 매우 호방한 군주로 나온다. 이 소설은 여러 차례 중국 및 홍콩특별행정구역 그리고 대만의 방송국에서 제작·방영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과거 iTV에서 방영되었던 《회옥공주》(懷玉公主)에서 명나라 영력제의 공주를 사랑하는 황제로 나왔으나 이 드라마에서 전개되는 내용은 거의 허구였다. 아직도 강희제는 그의 손자 건륭제, 할머니인 효장문황후, 그리고 청나라의 문을 닫는 서태후와 함께 청나라를 배경으로 한 역사 예술 작품 중 가장 많이 다루어지는 인물이다.\n\n2008년 마이크로소프트 사에서 만든 게임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아시아 왕조에 나오는 문명 중 하나인 중국의 지도자가 강희제이기도 하며 게임 역사에 그의 이력과 통치 철학 등의 내용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는 등 유럽 및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성군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는 대만 문제와 맞물려서 ‘하나의 중국’ 정책을 내세우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강희제의 대만 수복과 몽골 정복 등 그의 민족 융합 업적과 백성을 중히 여기는 이른바 ‘섬기는 리더십’을 높이 사 크게 추켜세운다.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인 장쩌민과 후진타오, 국무원 총리를 지낸 주룽지 역시 중국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강희제에게서 본받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과거 한족들이 오랑캐라 멸시하던 만주족 출신이고 그들의 지도자였던 강희제를 지금은 한족 중심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정치 스타일과 대만 수복 등에서 크게 추켜세우는 인물로 둔갑되었다며 이러한 열렬한 강희제 숭배 운동을 비판하였다.\\n\\n이러한 중국의 적극적인 강희제 홍보는 문화·예술 방면에서도 나타난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작가 얼웨허(이월하, 二月河)가 쓴 소설 《강희대제》는 중화인민공화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후속작들인 소설 《옹정황제》·《건륭황제》 등도 독자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구가하였다. 2001년에 중국중앙방송에서 소설 《강희대제》를 원작으로 한 《강희왕조》(康熙王朝)가 방송되어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사극 드라마 중 하나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강희제 역을 맡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견 배우인 천다오밍(진도명, 陳道明)은 어린 나이에 즉위한 강희제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그의 리더십, 자식들로 인하여 골치를 앓는 모습 등을 잘 보여주었다. 이로 젊은이들에게 강희제의 모습과 그의 이름을 더욱 많이 각인시켜, 중국의 국민 배우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강희왕조》를 시작으로 강희제를 다룬 많은 작품들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에서 방송되었고, 이 작품들의 인기 역시 높았다. 《강희왕조》 전에 방송하였으나 강희제의 다음 세대인 옹정 시대를 시대적 배경을 다룬 드라마 《옹정왕조》(雍正王朝)에서도 강희제는 현명하지만 《강희왕조》 때보다 자식들의 일로 피곤한 삶을 산 황제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그러나 홍콩 무협 드라마 《군림천하》(君臨天下)에서는 차남인 윤잉과 14남 윤제만을 편애하다가 이것이 한번도 부정을 받지 못하고 자란 4남 윤진에게 자극제가 되어 결국 윤진에게 염주로 목졸려 살해당하는 비운의 군주로 나온다.\\n\\n무협소설가 김용(金庸) 역시 청년의 강희제가 오배, 오삼계, 정경 등과 마찰을 빚을 때를 배경으로 한 무협소설 《녹정기》(鹿鼎記)를 썼는데, 여기에서 강희제는 매우 호방한 군주로 나온다. 이 소설은 여러 차례 중국 및 홍콩특별행정구역 그리고 대만의 방송국에서 제작·방영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과거 iTV에서 방영되었던 《회옥공주》(懷玉公主)에서 명나라 영력제의 공주를 사랑하는 황제로 나왔으나 이 드라마에서 전개되는 내용은 거의 허구였다. 아직도 강희제는 그의 손자 건륭제, 할머니인 효장문황후, 그리고 청나라의 문을 닫는 서태후와 함께 청나라를 배경으로 한 역사 예술 작품 중 가장 많이 다루어지는 인물이다.\\n\\n2008년 마이크로소프트 사에서 만든 게임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아시아 왕조에 나오는 문명 중 하나인 중국의 지도자가 강희제이기도 하며 게임 역사에 그의 이력과 통치 철학 등의 내용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는 등 유럽 및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성군으로 알려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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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삼존불감
"불상을 모시기 위해 나무나 돌, 쇠 등을 깎아 일반적인 건축물보다 작은 규(...TRUNCATED)
11~12세기에 제작된 본존불은 보통 어떤 나라의 특징이 전파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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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대학교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계사명 사리구는 총 4개의 용기로 구(...TRUNC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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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륜","조돈 (고려)","초고독불화","신돈","신돈","신돈","장면","장면","김녕(...TRUNCATED)

Dataset Card for "KLUE_mrc_negative_train"

KLUE mrc train dataset에 BM25을 이용해서 question에 대한 hard negative text 20개를 추가한 데이터입니다.

BM25로 hard negative text를 찾았고, preprocessing을 통해 중복 데이터를 최대한 삭제했습니다.

사용한 BM25의 정보는 아래와 같습니다.

top-k top-10 top-20 top-50 top-100
accuracy(%) 92.1 95.0 97.1 98.8

Citation

@misc{park2021klue,
      title={KLUE: Korean Language Understanding Evaluation}, 
      author={Sungjoon Park and Jihyung Moon and Sungdong Kim and Won Ik Cho and Jiyoon Han and Jangwon Park and Chisung Song and Junseong Kim and Yongsook Song and Taehwan Oh and Joohong Lee and Juhyun Oh and Sungwon Lyu and Younghoon Jeong and Inkwon Lee and Sangwoo Seo and Dongjun Lee and Hyunwoo Kim and Myeonghwa Lee and Seongbo Jang and Seungwon Do and Sunkyoung Kim and Kyungtae Lim and Jongwon Lee and Kyumin Park and Jamin Shin and Seonghyun Kim and Lucy Park and Alice Oh and Jungwoo Ha and Kyunghyun Cho},
      year={2021},
      eprint={2105.09680},
      archivePrefix={arXiv},
      primaryClass={cs.C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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